이면우 6

입동 / 이면우

무우 속에 도마질 소리 꽉 들어찼다 배추고랑이 된장국 안에 달큰해졌다 어둔 부엌에서 어머니, 가마솥 뚜껑 열고 밥 푸신다 김이 어머니 몸 뭉게구름 둘렀다 우리는 올망졸망 둘러앉아 한 대접씩 차례를 기다린다 숟가락 한번 들었다 놓고 젓가락 맞추고 크고 둥그런 상에서 가만히 기다린다 근데 오늘 저녁은 왜 이리 더디냐 현관 문 찰칵 열리며 찬바람 휘이익 들어오고 다녀왔습니다 외치며 아이가 따라 들어선다 그때 주방 김 말끔히 걷히자 거기, 아내가 구부정이 서서 등 보이며 압력솥 뚜껑을 열고 있다 - 입동 / 이면우 어제가 입동(立冬)이었다. 절기가 달력보다 앞서 겨울이 왔음을 알린다. 사람들은 세월이 빠르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안 난다. 집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가 그리 급하지는 않다. 느릿느릿 가는..

시읽는기쁨 2020.11.08

오늘, 쉰이 되었다 / 이면우

서른 전, 꼭 되짚어보겠다고 붉은 줄만 긋고 영영 덮어버린 책들에게 사죄한다 겉 핥고 아는 체했던 모든 책의 저자에게 사죄한다 마흔 전, 무슨 일로 다투다 속맘으론 낼, 모레쯤 화해해야지 작정하고 부러 큰 소리로 옳다고 우기던 일 아프다 세상에 풀지 못한 응어리가 아프다 쉰 전, 늦게 둔 아이를 내가 키운다고 믿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린 게 날 부축하여 온 길이다 아이가 이 구절을 마음으로 읽을 때쯤이면 난 눈썹 끝 물방울 같은 게 되어 있을 게다 오늘 아침, 쉰이 되었다, 라고 두 번 소리내어 말해보았다 서늘한 방에 앉았다가 무릎 한 번 탁 치고 빙긋이 혼자 웃었다 이제부턴 사람을 만나면 좀 무리를 해서라도 따끈한 국밥 한그릇씩 꼭 대접해야겠다고, 그리고 쓸쓸한 가운데 즐거움이 가느다란 연기처럼 솟아났..

시읽는기쁨 2020.06.17

빵집 / 이면우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씌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 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 빵집 / 이면우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시내 초입에 타이어 가게가 있다. 버스가 신호등에 걸려 멈추는 곳인데, 가게에 적힌 문구 하나가 늘 눈길을 끈다. "아기 우유값만 남기고 드립니다." 처음에는 가슴이 짠해서 쳐다볼 수 없었다. 자주 보니 조금은 덤덤해졌으나 밥벌이의 엄숙함..

시읽는기쁨 2014.09.07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이면우

배추 무 씨는 늦여름 꿈의 부피처럼 쬐그맣다 텃밭 풀 뽑고 괭이로 쪼슬러 두둑 세워 심었다 나는 가으내 돈 벌러 떠돌고 아내 혼자 거름 주고 벌레 잡아 힘껏 키워냈던가 김장독 삿갓 씌우고 움 파 무 거꾸로 세워 묻고 시래기 엮어 추녀 끝에 내걸으니 문득 앞산 희끗한 아침, 대접 속 무청이 새파랗다 배추김치 새빨갛다 그 아리고 서늘함 무슨 천년 묵은 밀지이듯 곰곰 씹어보다 눈두덩이 공연히 따뜻해지다 햇살 동쪽 창호에 붉은 날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이면우 예순 번의 겨울을 겪으면서 나의 따뜻했던 겨울은 언제였을까.먼 과거,철모르던 유년의 겨울로 돌아가면그 온기 아직 남아있을까.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살게 되었지만 이 겨울은 그리 따스하지 않다. 뭐가 빠져있길래 이리 차고 공허한걸까. 이 시가 그리는 ..

시읽는기쁨 2012.01.31

나무야 나무야 / 이면우

나무 아래 나무 둥치 두 팔 벌려 잡고 고개 쳐들어 우듬지께 보며 나무야, 나무야, 불러봤습니다 누굴 이토록 간절히 불러보기가 얼마만입니까 고개 젖혀 누구 환하게 올려다보기가 또 얼마만입니까 그때 바람결엔가, 수십백천만 잎사귀 일제히 흔들며 나무가 대답했습니다 큰 걱정 말라고 때 맞춰 비도 내릴 거라고 - 나무야 나무야 / 이면우 나무는 기다릴 줄 안다. 참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참는 것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기다린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무야 말로 도(道)에 가깝다. 큰 나무를 보면 눈 앞의 이(利)에 따라 허둥대는 내 꼴이 우습다.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오늘은 나무 선생님을 만나러 나가봐야겠다. 그분 앞에 서면 날 위로해 줄 따스한 한 말씀 내려주실 ..

시읽는기쁨 2006.11.18

거미 / 이면우

오솔길 가운데 낯선 거미줄 아침 이슬 반짝하니 거기 있음을 알겠다 허리 굽혀 갔다, 되짚어 오다 고추잠자리 망에 걸려 파닥이는 걸 보았다 작은 삶 하나, 거미줄로 숲 전체를 흔들고 있다 함께 흔들리며 거미는 자신의 때를 엿보고 있다 순간 땀 식은 등 아프도록 시리다. 그래, 내가 열아홉이라면 저 투명한 날개를 망에서 떼어 내 바람 속으로 되돌릴 수 있겠지 적어도 스물아홉, 서른아홉이라면 짐짓 몸 전체로 망을 밀고 가도 좋을 게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마흔아홉 홀로 망을 짜던 거미의 마음을 엿볼 나이 지금 흔들리는 건 가을 거미의 외로움임을 안다 캄캄한 뱃속, 들끓는 열망을 바로 지금, 부신 햇살 속에 저토록 살아 꿈틀대는 걸로 바꿔 놓고자 밤을 지새운 거미, 필사의 그물짜기를 나는 안다 이제 곧 겨울이 잇대..

시읽는기쁨 2004.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