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선 6

그냥 둔다 / 이성선

마당의 잡초도 그냥 둔다 잡초 위에 누운 벌레도 그냥 둔다 벌레 위에 겹으로 누운 산 능선도 그냥 둔다 거기 잠시 머물러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 내 눈길도 그냥 둔다 - 그냥 둔다 / 이성선 코로나로 격리되어 있으면서 비움과 내려놓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을 한다고 비워지고 내려놓게 되지야 않지만 일상이 비틀어지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 것이다. 늘 가슴 한 켠에 묵직한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누가 집어넣은 것이 아닌 내 스스로 만든 근심덩이다. 잔뜩 움켜쥐고는 힘들어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의미 있음이나 없음으로 가치를 나눌 수 없다. 존재는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할 뿐 내 분별심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내 주관과 아집에 의해서 '있는 그..

시읽는기쁨 2022.08.16

별을 보며 /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 별을 보며 / 이성선 얼마나 맑은 영혼이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시인의 마음은 얼마나 고운 걸까. 부끄럽다. 별을 본 지도 오래되었다. 마지막이 10년 전쯤 되던가. 마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 유성우를 기다렸다. 여주 생활의 막바지일 때였다. 그때로부터 별을 잊으면서 내 삶도 타락되어 갔다. 별은 인간답게 살아가..

시읽는기쁨 2015.11.10

도반 / 이성선

벽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는 지금 - 도반 / 이성선 나도 배낭을 지고 먼 길을 떠난다. 그곳은 꿈속에서만 있었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간절히 원하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히말라야는 어느 날 그렇게 하늘의 선물처럼 나에게 내려왔다...

시읽는기쁨 2009.01.06

몸은 지상에 묶여도 / 이성선

한밤 짐승이 되어 울까 눈물 가득 꽃이 되어 울까 광야에 웅크려 하늘을 본다 몸은 지상에 묶여도 마음은 하늘에 살아야지 이 가지 저 가지를 헤매며 바람으로 울어도 영혼은 저 하늘에 별로 피어야지 절망으로 울던 마음 그 가난도 찬연한 아픔으로 천상에 빛나야지 광야에 웅크려 다시 하늘을 본다 마음 잎새에 빛나는 별빛이어 눈물 가득 꽃이 되어 울까 한 마리 짐승이 되어 울까 - 몸은 지상에 묶여도 / 이성선 더 이상 값싼 희망에 매달리지 말자. 절망의 눈물도 감추려 하지 말자. 고통과 쓸쓸함과 영혼의 아픔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아니 그 길을 찾아 나서자. 시인의 시에서는 하늘과 별이 자주 나온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상의 고통이 영글어 하늘의 별빛으로 뜬다. 눈물과 아픔, 쓸쓸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마음..

시읽는기쁨 2007.06.19

TAO[2]

하늘과 땅이 태어나고 그 사이에 이름이라는 것이 붙여졌지만, 이름이란 겉모습을 말하는 그저 이름일 뿐. 아름다움과 추함은 서로 다른 몸이 아니랍니다. 아름다움은 추함이 있기에 아름답다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좋음과 나쁨도 마찬가지랍니다. 좋은 게 있으니까 나쁜 게 있지요. 나쁜 게 있으니까 좋은 게 있지요. 맞아요. 세상의 모든 '있음'은 '없음'이 존재하기에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서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편만 존재해서는 안 된답니다. 그렇다면 긴 건 어떨까요? 짧은 게 있어서 긴 게 있지요. 높은 건 어떨까요? 낮은 게 있어서 높은 게 있지요. 앞뒤는 어떨가요? 앞이 있어야 뒤가 있지요. 그러니 타오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조금 아는 걸 많이 안다고 떠벌리지 않아요. 그저 세상의 중심에 ..

삶의나침반 2006.03.12

얼굴 / 이성선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보면 나는 늘 미안해진다 수척하여 추운 듯 뼈만 남은 내 얼굴에 내가 미안해진다 때로 빛이 나고 윤기 있을 수도 있으련만 하느님이 얼굴을 주실 때에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을 텐데 안으로 향한 두 개의 큰 눈 외에는 어느 곳에 비추어 보이기가 부끄럽다 남 앞에 서기가 부끄러워서 하늘만 가끔 쳐다본다 하늘은 그래도 이해해 주시겠지 하고 잎 다 떨어진 가을 하늘이 제일 좋아서 쳐다보다 돌아와 백지 위에 비춘다 백지 위에는 추운 영혼의 시가 내 얼굴로 들어 있다. - 얼굴 / 이성선 어쩌다 거울을 보게 되면 거울 뒤에서 한 누추한 얼굴이 나를 보고 있다. 삶에 찌들고 욕심에 사로잡힌 사나이가 서 있다. 나는 거울 보기가 무섭다.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이 더욱 서럽기만 ..

시읽는기쁨 2005.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