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15

홍어 / 정일근

먹고사는 일에 힘들어질 때 푹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값비싼 흑산 홍어가 아니면 어떠리 그냥 잘 삭힌 홍어를 먹고 싶다 신김치에 홍어 한 점 싸서 먹으면 지린 내음에 입안이 얼얼해지고 콧구멍 뻥뻥 뚫리는 즐거움을 나 혼자서라도 즐기고 싶다 그렇지, 막걸리도 한 잔 마셔야지 입안의 즐거움이 온몸으로 퍼지도록 한 사발 벌컥벌컥 마셔야지 썩어서야 제맛 내는 홍어처럼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지 한 세월 썩어가다 보면 맛을 내는 시간이 찾아올 거야 내가 나를 위로하며 술잔을 권하면 다시 내가 나에게 답잔을 권하며 사이좋게 홍어 안주를 나눠 먹고 싶다 그러다 취하면 또 어떠리 만만한 게 홍어라고 내가 나를 향해 고함을 치면서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면서 크게 한번 취하고 싶다 - 홍어 / 정일근 삭힌 홍어 맛을 본 것..

시읽는기쁨 2021.08.17

은현리 천문학교 / 정일근

내 사는 은현리 산골에 별을 보러 가는 천문학교가 있다. 은현리 천문학교에서 나는 별반 담임선생님. 가난한 우리 반 교실에는 천체망원경이나 천리경은 없다.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부터 칠판을 깨끗이 닦아놓는 착한 하늘이 있고, 일찍 등교해서 교실 유리창을 닦는 예쁜 초저녁별이 있다. 덜커덩 덜커덩 은하열차를 타고 제 별자리를 찾아오는 북두칠성 같은 덩치 큰 별들이 있고, 먼 광년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숨을 헐떡이는 별도 있다. 오래 전 나도 별과 같은 학생이었다. 그 때의 우리들처럼 별들도 여간 말썽꾸러기가 아니다. 내가 출석을 부르는 사이 슬쩍 자리를 바꾸어 앉는 개구쟁이별이 있고, 시간시간 붉은 옷 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멋쟁이별도 있다. 그러나 나는 별들을 야단치지 않는다. 혹시 별이 울어 버릴까 두..

시읽는기쁨 2017.07.15

사월에 걸려온 전화 / 정일근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대며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 사..

시읽는기쁨 2017.04.30

나무 기도 / 정일근

새해에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우린 너무 빠르다, 세상은 달려갈수록 넓어지는 마당 가졌기에 발을 가진 사람의 역사는 하루도 편안히 기록되지 못했다 그냥 나무처럼 붙박혀 살고 싶다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고 어린 자식 기르며 말씀 빚어내고 빈가지로 바람을 연주하는 나무로 살고 싶다 사람들의 세상은 또 너무 입이 많다 입이 말을 만들고 말이 상처를 만들고 상처는 분노를 만들고 분노는 적을 만들고 그리하여 입 속에서 전쟁이 나온다 말하지 않고도 시를 쓰는 나무의 은유처럼 온몸에 많은 잎을 달고도 진실로 침묵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침묵으로 웅변하는 나무가 되고 싶다 삶은 베풀 때 완성되느니 그늘 주고 꽃 주고 열매 주는 나무처럼 추운 아궁이의 뜨거운 불이 되어주기도 하고 사람의 따뜻한 가구가 되는 나무처럼 가진 것..

시읽는기쁨 2017.01.01

사과야 미안하다 / 정일근

사과 과수원을 하는 친구가 있다. 사과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과 속에서 더운 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사과꽃이 새치름하게 눈뜨던 저녁이었다. 그 날 나는 천 년에 한 번씩만 사람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툭,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 전에 영혼을 울리는 저 따듯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 향기 가득하다. - 사과야 미안하다 / 정일근 얼마 전 ..

시읽는기쁨 2016.07.12

사는 맛 / 정일근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독이 빠진 복어는 무장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이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 그 하나라도 독처럼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도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 - 사는 맛 / 정일근 혀에는 미뢰가 있어 단맛, 짠맛, 쓴맛, 신맛, 매운맛 등을 느낀다고 한다. 인생의 맛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단맛만 밝히면 절름발이가 된다. 독이 든 복어를 먹는 사람처럼 삶의 고수는 짜고, 쓰고, 시고, 매운 인생의 맛도 즐기는 사람이 아닐까. 설사 즐기..

시읽는기쁨 2016.06.16

착한 시 / 정일근

우리나라 어린 물고기들의 이름 배우다 무릎을 치고 만다. 가오리 새끼는 간자미,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청어 새끼는 굴뚝청어, 농어 새끼는 껄떼기, 조기 새끼는 꽝다리, 명태 새끼는 노가리, 방어 새끼는 마래미, 누치 새끼는 모롱이, 숭어 새끼는 모쟁이, 잉어 새끼는 발강이, 괴도라치 새끼는 설치, 작은 붕어 새끼는 쌀붕어, 전어 새끼는 전어사리, 열목어 새끼는 팽팽이, 갈치 새끼는 풀치..., 그 작고 어린 새끼들이 시인의 이름보다 더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 어린 시인들이 시냇물이면 시냇물을 바다면 바다를 원고지 삼아 태어나면서부터 꼼지락 꼼지락 시를 쓰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그 생명들이 다 시다. 참 착한 시다. - 착한 詩 / 정일근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앞 시내는 물도 맑았고 고기들..

시읽는기쁨 2011.08.11

김밥의 시니피앙 / 정일근

표준어로 유순하게 [김:밥]이라 말하는 것보다 경상도 된소리로 [김빱]이라 말할 때 그 말이 내게 진짜 김밥이 된다 심심할 때 먹는 배부른 김밥이 아니라 소풍갈 때 일 년에 한두 번 먹었던 늘 배고팠던 우리 어린 시절의 그 김빱 김밥천국 김밥나라에서 마음대로 골라먹는 소고기김밥 참치김밥 김치김밥 다이어트김밥 아니라 소풍날 새벽 일찍 어머니가 싸주시던 김밥 내게 귀한 밥이어서 김밥이 아니라 김빱인 김빱이라 말할 때 저절로 맛이 되는 나의 가난한 시니피앙 - 김밥의 시니피앙 / 정일근 시니피앙? 이 말을 모르면 어디 가서 지식인 행세를 하기 어렵다. 그러나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식인들은 쉽고 단순한 것을 무척 어려운 말로 설명하는 재주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말에는 개인의 추억과 정서가 묻어 있다. 똑 같은 ..

시읽는기쁨 2009.08.29

가을 억새 / 정일근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폼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

시읽는기쁨 2008.10.30

사랑에 답하여 / 정일근

수선화 해를 따라 도는 꽃인 걸 마당에 노란 수선화 피어서 알았다 가녀린 꽃대에 크고 무거운 꽃을 달고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 간다 달마는 마음 따라 동쪽에서 왔다지만 땅 속에 마음 묻은 수선화의 해바라기는 갈 수 없는 사랑의 지독한 형벌이다, 고 나는 오래전부터 수선화 꽃 뒤에 놓여있는 낡은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나도 그런 아픈 사랑한 적이 있었다, 고 해를 기다리는 말없는 꽃이나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같은 앉음새 같은 가부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란 수선화 지면서 알았다 꽃은 마르면서도 해를 따라 가고 말라 바스라지면서도 저 수선화 뜨거운 해바라기는 멈추지 않았다 수선화 꽃 뒤에 놓아둔 의자도, 사실 누군가를 기다리겠다고 놓아두었지만 의자에 앉아 사람을 기다렸던 시간보다 비어두었던 시간 ..

시읽는기쁨 2007.12.09

패밀리 / 정일근

조심해! 자연에도 패밀리가 있다. 이딸리야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와 같은 패밀리가 있다. 자연의 패밀리란 사람의 족보로 치자면 같은 항렬자를 쓰는 형제나 사촌쯤 되는, 그러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의 족보와는 다른, 자연의 인드라망이 있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와 밀림의 왕인 사자는 고양이의 패밀리다. 고양이가 형이고 호랑이와 사자는 아우다. 은현리에 와서 도둑고양이에게 야단을 쳐보라. 달아나기는 커녕 느릿느릿 왕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며 빤히 쳐다보기까지 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배경에는 도둑고양이에게 왕이 둘이나 있는 패밀리의 '빽'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흘레붙는 개에 대해 뜨거운 물을 뿌리며 방해해서는 안된다. 늑대, 은빛여우, 너구리가 개의 패밀리다. 가끔씩 개가 하이톤의 고독한 늑대 울음소리..

시읽는기쁨 2007.11.20

집오리는 새다 / 정일근

왜 집오리는 날지 않을까, 기러기목에 속하는 우아하고 튼튼한 날개를 접어 퇴화시키며 저 넓고 푸른 하늘의 자유를 포기한 채 일용할 하루의 양식을 위해 도시의 더러운 시궁창에 거룩한 황금색 부리는 묻는 날지 않는 새, 집오리 시립 도서관의 먼지 쌓인 서가처럼 TV 앞에 침묵하는 우리들처럼 스포츠에 거세당한 이 시대처럼 날지 않는 집오리여, 너는 새다 길들여진 관습과 타성의 질긴 그물을 찢으며 빈 발목을 죄는 불안한 시대의 불안한 생존 사육의 쇠사슬을 풀고, 혁명하라 날아라 집오리여, 새여 달 밝은 우리나라의 가을밤 기역 자 시옷 자로 무리지어 힘차게 날아가는 쇠기러기, 청둥오리떼를 따라 우리 다 함께 무서운 무리의 힘으로 힘차게 날개짓 하며 산맥을 넘어 국경을 넘어 자유의 하늘로 푸른 하늘로 - 집오리는 ..

시읽는기쁨 2006.10.21

가을 부근 / 정일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가을 부근 / 정일근 무더웠던 여름도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젠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선선하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여름내 열어놓았던 뒤켠 보일러실의 창문을 나도 닫았다. 거기에 거미줄이 엉켜있는 걸 ..

시읽는기쁨 2006.09.04

부석사 무량수 / 정일근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 부석사 무량수 / 정일근 해가 지지 않는다면 밝음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그 꽃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유한하고 끝이 있어서 애틋..

시읽는기쁨 2006.08.24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정일근

오줌 마려워 잠 깼는데 아버지 어머니 열심히 사랑 나누고 계신다. 나는 큰 죄 지은 것처럼 가슴이 뛰고 쿵쾅쿵쾅 피가 끓어 벽으로 돌아누워 쿨쿨 잠든 척한다. 태어나 나의 첫 거짓말은 깊이 잠든 것처럼 들숨 날숨 고른 숨소리 유지하는 것, 하지만 오줌 마려워 빳빳해진 일곱 살 미운 내 고추 감출 수가 없다. 어머니 내가 잠 깬 것 처음부터 알고 계신다. 사랑이 끝나고 밤꽃 내음 나는 어머니 내 고추 꺼내 요강에 오줌 누인다. 나는 귀찮은 듯 잠투정을 부린다. 태어나 나의 첫 연기는 잠자다 깨어난 것처럼 잠투정 부리는 것, 하지만 어머니 다 아신다. 어머니 몸에서 내 몸 만들어졌으니 어머니 부엌살림처럼 내 몸 낱낱이 알고 계신다. -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정일근 겨울이 되면 온 식구들이 한 방에 모여 잠..

시읽는기쁨 2005.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