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9

고향집 나팔꽃

고향집 울타리를 따라가며 나팔꽃이 피어 있다. 돌담을 지나고, 기와 덮개를 지나고, 버려진 슬레이트를 지난다. 소년 시절의 꽃으로 기억나는 건 화단의 붉은 채송화, 그리고 가꾸지 않아도 덩굴을 뻗으며 자라던 나팔꽃이다. 지금 이 꽃은 50년 전 그 나팔꽃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나팔꽃의 꽃말이 '덧없는 사랑'이라고 한다. 아침에 피었다가 낮이면 꽃잎을 닫아버리는 모양에서 사람 사이의 사랑을 연상했는지 모른다. 삶도 다르지 않다. 결국은 '덧없음'으로 귀결되는 게 우리 인생이 아닐까. 나팔꽃에서는 힘찬 팡파르 대신 애조 서린 가락이 흘러나오는 것만 같다. 한쪽 시력 잃은 아버지 내가 무심코 식탁 위에 놓아둔 까만 나팔꽃 씨를 환약인 줄 알고 드셨다 아침마다 창가에 나팔꽃으로 피어나 자꾸 웃으시는 아버지 - ..

꽃들의향기 2015.09.04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서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고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폐사지처럼 산다 / 정호승 휴대폰을 끄고 연락을 끊은지 석 달이 되어간다. 몇 친구에게는 잠수중이라고 알렸지만, 대부분에게는 아무 소식 주지 못했다...

시읽는기쁨 2014.03.28

베란다의 수선화

봄은 베란다에서 피어나는 수선화와 함께 시작된다. 이제부터 꽃들과 만날 기대에 가슴이 설렌다. 귀엽고 예쁘면서, 착하기도 한 나의 모델들. 올들어 처음 찍어본 꽃사진이다. 아프고 외로운 그대에게 수선화의 향기를 전합니다. 이 시와 함께.... 우리는 너나 없이 아프고 외로운 존재라는 걸 잊지 마세요.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

꽃들의향기 2012.03.14

밥값 /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밥값 / 정호승 서점에 간 길에 정호승 시인의 신작시집 을 샀다. 지난 천안함 사건 때 시인에 실망하여 시를 읽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꼭 그럴 일만 아니다 싶었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으면 편식이 된다. 내 생각이 존중받으려면 나와 다른 생각도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는 시 자체로 즐기면 되는 것이지 시인의 사상이나 행위와 꼭 결부시킬 필요는 ..

시읽는기쁨 2010.12.22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않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 수선화에게 / 정호승 그런 시절이 있었다. 너무 외롭고 답답했다.내 속마음을 들어줄 사람 하나도 없었다. 술만 마시면 눈물을 흘렸다. 그때 이 시의 따스한 손길에 또 울었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싯구 하나하나가 가슴에 파고들었..

시읽는기쁨 2010.05.08

서울의 예수 / 정호승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

시읽는기쁨 2009.11.09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 정호승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 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시읽는기쁨 2007.11.21

연꽃

고창에서 해리로 가다 보면 길옆에 작은 연못이 있다. 지금 이곳은 연꽃이 만개하고 있어서 무심코 지나가는 나그네가 ‘아-’하고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아름답다. 안쪽에는 정자도 있고, 더 들어가면 산 아래에는 농촌 마을이 있는데 이 연꽃 연못으로 인하여 마을은 다른 곳과 달리 뭔가 예술적인 분위기가 난다. 저 마을에는 연꽃의 운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불교의 아름다운 설화인 염화시중(拈花示衆)의 이야기에 나오는 꽃은 아마 연꽃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들자, 가섭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처염상정(處染常淨), 연꽃은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자라면서도 그 꽃만은 맑고 깨끗해서 번뇌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정신을 나타낸다. 그러나..

꽃들의향기 2005.08.05

12월 / 정호승

하모니카를 불며 지하철을 떠돌던 한 시각장애인이 종각역에 내려 흰색 지팡이를 탁탁 두드리며 길을 걷는다 조계사 앞길엔 젊은 스님들이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 사이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플래카드를 내걸고 분주히 행인들에게 팥죽을 나누어준다 교복을 입은 키 작은 한 여고생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그냥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의 손을 이끌고 팥죽을 얻어와 건넨다 나도 그 분 곁에 서서 팥죽 한 그릇 얻어 먹는다 곧 함박눈이 내릴 것 같다 - 12월 / 정호승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고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만나고 너와 내가 가슴으로 만나서, 따스한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진다면..... 그냥 지나가는 이웃의 손을 이끌고, 같이 팥죽을 나누는 세상이 된다면..... 펑펑 내리는 함박눈이 기다려진다.

시읽는기쁨 2004.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