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탁타의 본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곱사병을 앓아서 등이 위로 불룩하게 솟는 바람에 기다시피 허리를 구부리고 다녔다. 그 모습이 마치 낙타와 비슷하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탁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말을 듣고는, “좋구나. 내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하고 본명을 버리고 스스로 곽탁타라 하였다.
그가 살던 마을 이름은 풍악인데 장안 서쪽에 있었다. 탁타는 나무 심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모든 장안의 호족과 부호들은 그가 나무 심는 것을 구경하기 좋아했고, 과일을 파는 사람들은 다투어 그를 맞아 거두어 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어도 잘 살 뿐만 아니라 크게 무성하여 결실이 빠르고 수확이 풍성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그대로 해보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느 날 그에게 나무를 심는 법을 물어보는 이가 있었다. 탁타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가 나무를 오래 살게 하고 무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나무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다하게 할 따름입니다. 나무의 본성이라는 것은 뿌리는 뻗고자 하고, 북을 돋을 때는 편편하게 해주는 것을 좋아하며, 흙은 본래부터 자라던 곳의 것을 좋아하며, 뿌리를 다진 때에는 꼭꼭 밟아서 흙이 뿌리에 잘 붙게 해주는 것을 좋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미 다 심은 다음에는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 걱정하지도 말아야 하며, 일단 가버린 다음에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심기는 사랑하는 자식같이 하고 버리기는 미운 자식같이 하면 나무는 자기의 천성을 온전히 하여 그 성질대로 잘 자랄 것입니다. 나는 다만 나무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지 그것을 크게 하거나 무성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열매를 맺는 것을 억제하거나 손상되게 하지 않을 뿐이지 열매가 일찍 열게 하거나 많이 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를 않습니다. 심을 때 뿌리는 주먹처럼 오그라들게 하고 흙을 채울 때는 본래부터 붙어있던 흙을 버리고 다른 흙을 바꾸어 넣습니다. 북을 돋을 때도 너무 지나치게 하거나 아니면 너무 모자라게 합니다. 나무의 성질을 이렇게 거스르는 사람은 나무를 사랑하는데 있어서도 지나치게 하고 걱정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지나치리만큼 부지런을 떨기 일쑤입니다. 아침에 와서 들여다보고 저녁에 와서 어루만지고, 또 갔다가는 다시 와서 돌아봅니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벗겨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뿌리를 흔들어서 단단히 심어져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도 합니다. 해서 날이 지날수록 나무는 그 본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결국 말라 죽게 됩니다. 비록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나무를 해치는 것이요 걱정한다고 하지만 실은 나무에게 원수가 되는 것이지요. 나는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을 뿐입니다. 나에게 무슨 남다른 재주가 있겠습니까?”
그에게 나무 심는 법을 물은 사람이 말했다.
“당신의 나무를 심는 법을 빌려서 관리가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로 삼으면 어떻겠는가?”
그러자 곽탁타가 말했다.
“나는 나무를 심을 줄만 알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나의 직업이 아니어서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시골에 살면서 수령들이 하는 것을 보니까, 번거롭게 명령 내리기를 좋아하여 백성들을 지극히 불쌍히 여기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백성들에게는 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관리들이 마을에 와서는 백성들을 불러내어 상부의 명령이라면서, 밭을 갈라고 재촉하고, 심기를 힘쓰게 하며, 거두기를 독촉합니다. ‘빨리 실을 자아라, 빨리 베를 짜라, 어린아이들을 잘 길러라, 닭과 돼지를 잘 길러라.’라고 합니다. 우리 같은 소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차려서 관리들을 대접하기에도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언제 틈을 내서 우리의 생활을 윤택케 하며 나의 마을을 편안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도리어 병이 나고 게을러지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라면 나의 나무 심는 일이 정치하는 일과 무관한 것도 아니겠지요.”
묻던 사람이 기뻐서 말했다.
“아, 나무 기르는 법을 물었다가 오히려 사람 기르는 법까지 알게 되었구나. 이 사실을 후세에 전하여 관리가 백성을 다스리는 계칙으로 삼으리라.”
이 글은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이 쓴 ‘나무 심는 곽탁타 이야기’이다. 꼭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같다. 아마 장자 속 한 부분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장자 ‘덕충부’편에 보면 애태타라는 비슷한 이름의 사람도 나온다. 나무 심는 법을 물어본 사람은 곽탁타와의 문답을 통해 사람 기르는 법을 알게 되고 나아가 정치의 요체까지 파악하게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좁게는 가정의 자식 키우는 일에서부터 나라의 정치에까지 곽탁타의 충고는 미친다. 특히 부모로써 뜨끔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나는 다만 나무로 하여금 자기의 본성을 다하게 할 따름입니다.” 부모나 교사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나무를 사랑한답시고 아침저녁으로 어루만지고, 제대로 자라는지 땅을 파서 헤집어도 보면서 부지런을 떠는 것은 나무를 해치는 행위다. 요즈음 부모들의 모습이 이에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세상이 요구하는 틀에 맞추기 위해 어릴 때부터 영어교육, 예능교육, 심지어는 미래의 대학 입학 준비까지 일률적으로 강요한다. 뭔가 하나만 모자라도 경쟁에서 낙오될까봐 전전긍긍한다. 이것은 어린이의 생명력을 죽이는 것이고 인간 본성에 반하는 나쁜 짓이다. 그래서 기능적인 아이가 된들 뿌리가 튼실하지 못하니 반쪽 인간으로밖에 성장하지 못한다.
지나친 간섭은 도리어 화를 부른다. 그러느니보다는 차라리 방임해두는 편이 낫다. 생명에는 천래의 나침반이 있어서 스스로 옳은 길을 찾아 나간다. “심은 다음에는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 걱정하지도 말아야 하며, 일단 가버린 다음에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식의 성장에 대한 믿음과 신뢰라고 본다. 부모의 선입견에 의해서 무엇을 강요하기보다는 신뢰의 눈으로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길이 아닌가 싶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의 인도자가 아니라 조력자로 그쳐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이 교육열의 광풍도 조금은 잠잠해지지 않을까.
자랑하고픈 나무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도리어 나무를 망친다. 잘 사는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 지도자의 소신과 자신이 도리어 국민을 힘들게 하고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 가정에서부터 나라에까지 곽탁타의 지혜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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