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완행열차 / 허영자

샌. 2009. 3. 13. 09:21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국화

애틋이 숨어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모를 뻔했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상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는 모를 뻔했지

 

- 완행열차 / 허영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는 고향을 오갈 때면 늘 완행열차를 타고 다녔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완행열차는 작은 시골역까지 찾아 쉬면서 느릿느릿 달렸다. 지금 감각으로는 달렸다고 하기에도 민망한데 고향까지 가는 데는 거의 7 시간이 걸렸다. 또 마음 착한 완행열차는 교행하는 기차가 있으면 한없이 기다려줄 줄도 알았다.

 

바깥 풍경을 여유있게 감상하기에는 완행열차의 속도가 상한선이 아닌가 싶다.의자에 하얀 천이 씌어진 급행열차를 타면서부터는 밖을 보는 일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재작년에 KTX를 처음 탔을 때 가장 기이했던 점은유리창 밖의 풍경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속도에서는 풍경은 더 이상 정적일 수가없다. 질주하는 속도는 모든 풍경을 날카로운 직선으로 바꾸어 버린다.

 

완행열차의 속도는 고향집 대문 앞에 나와 손을 흔드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살펴볼 수 있는 속도다. 서울로 가는 기차는 고향 동네 앞을 지나갔는데 가족들은 기차에 탄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나 역시 유리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속도가 빨라지면서 유리창은 밀폐되었고 눈에 힘을 주어도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바깥 경치에 흥미를 잃어갔다.

 

그때의 완행열차는 원주역에서 한참을 쉬었다. 아마 뒤에서 미는 기관차를 새로 연결해야되었기 때문이라고 기억한다. 그 시간에는 플랫폼에 내려가 따끈한 가락국수를 사 먹기도 했다. 출발한다는 차장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면 어떤 때는 다 먹지도 못하고 부리나케 뛰던 기억도 난다.그러나 아무리 느려도 완행열차는 승객을 놓치고 가는 일은 없었다.

 

이만큼 나이가 들고 보니 그 시절의 완행열차가 더욱 그리워진다. 느리고 지저분하고 시간을 안 지키기는 했지만 반면에 따스하고 인간적이고 낭만적이었다. 도대체 빨리 간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남보다 앞서가고 또 무언가 성취를 한다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드러나지 않는 일상의 작은 행복들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게 아닐까? 산길에서 만난 작은 꽃 한 송이, 미소 띤 동료의얼굴, 가족과의 따스한 저녁 식탁, 무심히 바라보던 저녁 노을 등 자잘한 행복들은 우리 곁에 널려 있다. 인생의 끝에 설 수록 감사하고 아름답게 추억되며 나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그런 사소한 것들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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