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랑탕 트레킹(13)

샌. 2009. 2. 23. 08:05

히말라야의 대기는 맑고 깨끗하지만 대신에 무척 건조하다. 밤에 잘 때면 입술과 입안이 바싹바싹 탄다. 그래서 잠에서 깰 때면 꼭 물을 마셔주어야 한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밖에 나왔다가 히말라야의 밤하늘에 끌려 마당에 앉았다. 다행히 이곳은 고도가 낮아선지 밤공기가 그다지 차지 않았다. 사위는 고요한데 초저녁에는 보이지 않던 북두칠성이 올라오고, 하현달은 옅은 안개 속에서 졸고 있었다. 내가 히말라야에 와서 이 아름다운 트레킹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내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도움 덕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하늘의 달과 별, 그리고 히말라야 신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이곳과의 인연이 맺어질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침 7시, 동편 하늘의 노을을 보며치소바니로 출발했다. 오늘도 점심은 라면을 먹기로 했는데 미리 가서 끓여야 된다는 핑계를 대고 선두 그룹에 섰다. 선두에서 걸으면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다. 뒤에서 걸으면 따라가기가 바쁘지만 앞에서 걸으면 원하는 곳이나 경치가 좋은 곳에서 충분히 쉴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리고 빨리 걷는데도 뒤에서 따라가는 것보다 덜 지치는 것 같다. 까마득하게 뒤처져서 오는 후미를 보면 왠지 심리적으로 고양되고 더욱 힘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오늘 역시 오르내림이 심했지만 능선을 따라가는 길과 경치는 환상적이라 할 만큼 아름다웠다. 점점 낮은 데로 내려가니 민가와 경작지가 자주 나타났다. 특히 이곳은 평지가 없는 산악지대라 산비탈은 거대한 다랑이 밭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히말라야의 다랑이 밭을 보면 그 예술적 조형미와 함께 인간 능력에 대한 경외감으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먹고살기의 지엄함이랄까,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수고로움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나타내주는 장면도 없을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그 안에 슬픔을 안고 있다는 말은 지금 이곳 히말라야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나 삶은 일차원적인 먹고살기의 차원에서 초월해야 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웅장하고 신비한 설산에 둘러싸여 살면서 척박한 환경과 싸워야 하는 이곳 사람들이 종교적이 되지 않는다면 도리어 이상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마을을 지나면서 빨래를 하는 한 가족을 만났는데 남자를 비롯해서 아이까지 모두 손을 거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는 빨래든 농사일이든 기타 작업이든 일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고 가족이 함께 하는 걸 자주 본다. 부엌에 들어가면 불알 떨어진다고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대’한민국의 남자 눈에는 기이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모습이었다. 남자와 여자,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로 구분되어 있는 우리의 전통적인 사고가 지금은 무너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런 광경은 여전히 낯설다. 우물 안 개구리의 고정관념이 깨지는 경험을 하는 것은 넓은 세상을 여행하는 매력 중 하나이다.




사방이 트인 능선 길은 어디서나 경치가 좋았지만 군계일학으로 특히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타쉬데레(Tashidele) 롯지였다. 망망대해에 작은 섬처럼 떠있는 이 롯지 둘레에 360도로 펼쳐진 파노라마의 풍경은 걸으면서 계속 보아온 것인데도 새롭고 색달랐다. 마치 여기가 구면거울의 초점에 해당되는 듯 주위의 기가 집중되는 느낌이었다. 이곳의 깔끔한 주방 또한 우리들의 주목을 끌었다. 네팔의 집들이 겉으로는 허름하게 보이지만 안에 들어가면 의외로 깨끗하고 단정하다. 부엌의 그릇이나 집기들이 정리된 모양은 마치 가게의 진열장과 비슷할 정도로 정돈이 잘 되어 있다. 네팔의 아낙네들이 그릇을 닦는 정성은 여러 차례 보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부엌들을 보며 한국의 어느 부엌보다 더 청결하다고 감탄을 했다.




급경사의 내리막길을 한참을 내려갔는데 경사가 얼마나 급한지 내리막인데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때 마신 콜라 한 잔은 냉장고에서 나온 것이 아닌데도 이제껏 마셔본 그 어느 콜라보다도 더 시원했다. 내리막의 끝에 동네가 있었고 학교 운동장에는 아이들이 많이 놀고 있었다. 길이 운동장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일행 중 일부는 가져간 볼펜 등을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네팔의 아이들을 보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볼펜이 동났는데도 어떤 아이들은 학교 밖 수백 미터까지 따라오며 더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다시 높이가 만만치 않은 산을 올라야했다. 지름길로 간다고 샛길로 들어섰다가 일행을 놓쳐서 혼자가 되어 버렸다. 앞서간 사람의 스틱 자국을 보며 따라갔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외톨이가 되니 마음이 급해지고 힘은 더 들었다. 그 길에서 흙 벼랑에 핀 보라색의 작은 꽃 하나를 만났다. 비만 내려도 쓸려가 버릴 것 같은 생명의 불안함이 안스러웠지만 꽃은 아는지 모르는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철새가 먼 거리를 날 수 있는 것은 간절한 그리움의 힘 때문이라고 S가 말했는데, 이 꽃은 무엇이 그리워서 불안한 이 벼랑에다 뿌리를 내렸을까? 김용택 시인은 마치 이 꽃을 두고 부른 것처럼 이렇게 노래했다.


‘간절하면

가 닿으리

너는 내 생각의 끝에 아슬아슬 서 있으니

열렬한 것들은

다 꽃이 되리

이 세상을 다 삼키고

이 세상

끝에

새로 핀

한 송이’




카트만두가 가까워졌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안타깝게도 매연 구름이었다. 카트만두 쪽에서부터 히말라야 쪽으로 진한 회색의 매연 띠가 두텁게 깔려 있었다. 카트만두의 소음과 매연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제 내일이면 다시 그 별난 도시로 들어가게 된다.




드디어 히말라야에서의 마지막 숙소인 치소파니(Chisopani)에 도착했다. 해발 고도 2,215m, 카트만두에 가까워서인지 이곳의 롯지에는 전기도 들어오고 온수도 나왔다. 이제 문명세계에 다가가고 있음을 실감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닭을 삶아 먹으며 영양보충을 했다. 이번에는 두 사람당 한 마리씩 돌아가도록 푸짐히 시켜 배가 터지도록 포식을 했다. 히말라야에서 마지막 밤이라는 아쉬움과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이 겹쳐졌다. 건배를 하는 얼굴은 웃었지만 그러나 가슴 한 편에서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진하게 피어올랐다. 트레킹 종료를 가장 기뻐한 사람은 포터들이었다. 팁까지 받고 모든 계산을 끝낸 그들은 환호를 하며 춤과 노래로 파티를 열었다.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롯지 옥상에 올라가서 히말라야의 밤하늘을 아쉽게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고 별은 총총했다. 작은 삼각대에다 니콘 FM을 북쪽으로 고정하고 조리개를 열어 히말라야의 별을 담았다. 여기에 오기 전에 히말라야의 별은 가장 기대했던 것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히말라야 높은 곳에서는 몸이 너무 피곤해서 별이고 뭐고 관심이 없었다. 그저 침낭에 빨리 들어가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 트레킹을 마치는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조용히 별을 만나는 시간이 찾아왔다.


문득 이런 질문이 일어났다. 내가 히말라야에 왜 왔지? 그러나 히말라야는 ‘왜’라는 물음마저 지워버린다. 영화 ‘버킷 리스트’처럼 죽기 전에 와보고 싶었던 것도 한 이유였는데 지금은 그런 목록도 별 의미가 없어졌다. 또 영혼의 비움이나 정화를 위해서라고 고상한 핑계를 대기도 했지만 다 헛된 망상이었음을 여기 와서야 깨닫는다. 히말라야에 오른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랑하고 싶은 욕망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만이든 겸손이든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파스칼이 말한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티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우주에서는 지구조차 한낱 먼지에 불과할 뿐, 그 먼지 안에서 또 다른 먼지를 차지하려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인간의 탐욕과 집착은 얼마나 허망한 짓거리인가.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 모든 것은 ‘바람 속의 먼지’[Dust in the wind]일 뿐이야.


‘그렇게 집착하지 마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바람에 나부끼는 먼지

우린 모두 바람에 흩날리는 먼지야

바람에 나부끼는 먼지

모두 다 바람에 나부끼는 먼지일 뿐이야’


포터들의 노랫소리가 잦아들고, 룸 파트너인 J도 돌아왔다. 나는 카메라의 셔터를 끊었다. 찰칵 하고 한 세계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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