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랑탕 트레킹(7)

샌. 2009. 2. 14. 08:24

밤에는 잠자는 도중에 숨이 차서 수없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가슴이 답답해지면 호흡을 급하게 해야 진정이 되었다. 이런 현상도 고소의 특징인데 유난히 나한테 심하게 나타났다. 그렇게 잠을 설쳤던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무척 무거웠다.


계란후라이와 누룽지로 아침 식사를 하고 7시에 키모슝리(4,620m)로 출발했다. 키모슝리는 순수한 수직 높이만 750 m를 올라야 하는 산인데 여기를 오전 중에 다녀와야 한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몸이 무거워서 처음부터 후미에 처졌는데 선두와의 간격은 갈수록 벌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두 그룹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뒤에는 유일하게 B가 따라왔는데, 결국 B는 체력이 달려 등정을 포기했다.




홀로 산을 오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산을 올라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산을 누가 대신 올라가 줄 수 없듯이 인생 역시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어도 그들이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아프고 약한 사람을 부축하며 함께 나아가는 것이 귀하지만 그러나 삶은 철저히 한 사람의 몫일 뿐이다. 인생은 자기 몫의 삶을 자신의 책임하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외롭고 고독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산길이나 인생길이나 목표에 얼마나 빨리 이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속도가 빠르든 느리든 자신의 걸음으로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리라. 설령 그가 목표지점에 다다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이른 그곳이 그에게는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급경사는 아니었으나 4천 m를 넘는 고소에서의 오르막길은 정말 너무나 숨이 차고 힘들었다. 서너 걸음 가다 멈추고 심호흡, 또 몇 걸음 걷다가 멈추고 깊이 심호흡을 해야 했다. 앞서 나가버린 동료들이 부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고소에서는 사람 얼굴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즐겁게 웃곤 했다. 모두들 얼굴이 보름달처럼 동글동글해져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은 주름살이 없어져서 좋다고 농담을 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누군가 나를 ‘찐빵’이라고 불렀다. 사진에서도 그런 변화가 확연히 느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 능선에 이르니 맞은편 설산이 클로즈업으로 다가왔다. 계곡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장관이었다.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온 포터와 잠시 기념사진을 찍고는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정상으로 향했다. 선두 그룹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한 나를 모두들 박수로 환영해 주었지만 너무 힘들어 아무 정신이 없었다. 에베레스트 같은 정상에 선다면 그 감격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만약 죽기살기로 올랐다면 눈앞의 풍경이 제대로 들어오기나 할지 의문이다. 이번 나의 경우가 그랬다. 올라가자마자 바로 출발하는 일행을 다시 뒤따라가느라 허둥댄 기억밖에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만세를 부르며 사진 한 장은 남겼다.



캰진리까지의 칼날 능선을 지나니 그 다음부터는 지그재그의 급경사 내리막이었다. 흙길은 먼지가 엄청 많이 일었다. 바로 아래쪽으로 우리가 묵고 있는 캰진곰파 마을이 보였다. 내려오는 도중에 보이는 넓은 계곡 풍경은 일품이었다. 계곡 너머로는 나야칸가(5,844m)를 비롯한 설산들과 칸자라패스가 보였다. 눈 덮인 저 패스를 넘으면 헬람부 지역으로 갈 수 있다.






12시 30분에 롯지에 도착하여 라면을 끓여서 티베트 빵과 함께 먹었다. 입맛이 없으니 이마저도 충분히 먹지 못했다. 키모슝리에 다녀오느라 너무 힘들었고 다시 몸살기가 나타났다. 오후는 그냥 여기서 쉬었으면 좋으련만 촉박한 일정 때문에 다시 짐을 싸야 했다. 고사인쿤드로 가기 위해서는 왔던 길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야크 젖으로 만든 치즈를 구입했다. 1 kg에 400 루피였는데 시큼한 맛이 나는 흰색의 덩어리였다. 언젠가 직장의 한 사무실에서 이 치즈 맛을 본 기억 때문이었는지 사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다.


키모슝리에 오르지 못했던 B는 고소병이 심해져 토하면서 먹지를 못했다. 배낭은 가이드에게 맡기고 겨우 걸음을 옮겼는데 다행히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었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회복되었다. 고소증세가 나타나면 충분히 휴식을 취하든가 아니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자연히 증세가 없어진다.



뒤돌아보니 오전에 올랐던 키모슝리를 비롯한 산들이 보였다. 왼쪽 설산 앞쪽에 있는 봉우리가 키모슝리이고, 맨 오른쪽 봉우리는 우리가 등정을 포기했던 4,984 m의 체르고리다.




작은 마을을 지날 때 집 앞에 한 여인과 아이들이 나와 있었는데 사탕과 머리핀을 주니 무척 좋아했다. 그런데 한국 아이들과 네팔 아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눈빛이다. 네팔 아이들의 눈은 말 그대로 아이들의 눈이다. 맑고 순수하고 아름답다. 그 눈 속에는 히말라야의 푸른 하늘과 호수가 담겨있는 것 같다. 그것은 네팔 어른들도 대동소이했다. 아름다우면서도 뭔가 호소하는 듯한 연민을 담고 있는 눈, 네팔 사람들 하면 그 강렬한 눈빛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인도 계통의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진짜 네팔 아이들을 만나려면 관광객들과 접촉하는 않는 오지로 들어가야 한다고 얘기를 들었다. 거기서는 외지인을 보면 수줍어서 도망가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 그대로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오후 4시에 랑탕의 샹그릴라 롯지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올라올 때 묵었던 같은 롯지였다. 랑탕은 마을 인근에 소형 수력발전소가 있어서 전기가 들어왔다. 그러나 전기의 편리함을 누리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지쳤다. 밤이 되니 바람 소리가 거세지며 추워졌다. 랑탕은 바람의 마을이다.




밤이면 침낭 안에 뜨거운 물통을 넣고 온기를 유지했는데 불행하게도 물통의 플라스틱 뚜껑이 증기압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이번에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새로 마련한 옷이나 장비 대금이 150만 원 정도 되었다. 침낭은 빌렸는데도 그 정도로 들었다. 나로서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고 그래서 대부분 싼 제품으로 했는데, 결국은 싼 게 비지떡이었다. 결정적인 때에 탈이 났으니 이젠 온전히 내 체온만으로 히말라야의 겨울밤을 견뎌야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이불을 빌려 침낭 위에 덮고 잤다.


몸도 아프고 이런저런 짜증나는 일들도 생기니 그만 트레킹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혼자라도 카트만두로 돌아가 버리자. 그러나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다시 이를 악물었다. 누구처럼 자유롭게 혼자 다니는 처지라면 하루만 푹 쉬어도 제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계획된 일정에 함께 움직여야 되는 몸이라 힘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저녁이면 몸은 천근만근이고 만사가 귀찮기만 했다. 이럴 때는 집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스위치만 돌리면 전기가 들어오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신기한 마술의 나라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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