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랑탕 트레킹(6)

샌. 2009. 2. 12. 08:13

랑탕 트레킹의 전반부에서는 오늘과 내일이 가장 중심이 되는 날이다. 특히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랑시샤카르카까지 다녀온다. 이곳은 이번 트레킹에서 최고의 절경지대라고 할 수 있다. 랑시샤카르카의 고도는 4,160 m, 우리가 있는 캰진곰파와는 300 m 정도밖에 고도 차이가 나지 않지만 왕복 24 km나 되는 긴 길이다. 4천 m 급의 고소에서 하루에 24 km를 걷는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새벽에 눈을 뜨니 몸은 개운했다. 그런데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가니 물이 꽁꽁 얼어있어 사용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헤드랜턴에 의지해 롯지 뒤 산자락에 가서 볼일을 보았다. 캄캄한 어둠이 부끄러움을 가려 주었는데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보며 배설하는 시원한 쾌감도 있었다. 아침 식사는 계란볶음밥을 시켰는데 일행 중에서는 유일하게 나만이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오늘은 포터들이 우리들 배낭을 메고 1:1로 우리와 동행하게 되어 있다. 처음으로 배낭 없이 걷게 되니 몸은 아주 가뿐했다. 더구나 오늘 길은 거의 평지에 가까우니 내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포터들과 한데 어울려 기념사진을 찍고 캰진곰파를 7시에 출발했다. 랑탕2봉이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들고 아직 서쪽으로 넘어가지 못한 달이 하늘에 걸려 있는 아침이었다. 몸은 가벼웠고 마음은 설레었다. 오늘은 처음부터 선두 그룹에 들어서 신나게 걸었다.




한국의 산이나 계곡도 멋있는데 왜 굳이 히말라야까지 고생하며 찾아가는가? 히말라야에 오기 전 사람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대답을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냥 그곳에 가고 싶다는 내적 욕구가 있었을 뿐, 그걸 왜라고 묻는다면 나 자신도 모르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산도 아름답지만 히말라야에는 그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장엄이라고 해야 할까, 히말라야에 서면 무언가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히말’은 ‘신의 거처’라는 뜻이라고 한다. 히말라야에 서면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겉으로 보이는 웅장함을 떠나 눈에 보이지 않는 범접하기 어려운 숭고한 기운에 휩싸이는 듯한 느낌은 히말라야가 아니고서는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그 강렬하고 근원적인 느낌을 인간의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히말라야만의 마력이라고 하겠다.


랑시샤카르카를 왕복하면서도 느꼈는데 히말라야 풍경에는 서로 반대되는 요소들이 녹아있다. 남성성과 여성성, 단순과 복잡, 흑백과 칼라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어우러져 히말라야를 만든다. 날카롭고 거대한 산의 모습에 압도되다가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선과 색깔을 보며 따스한 위무를 받게 된다. 또 나무도 풀도 없는 황량한 풍경이 이 세상 무엇보다도 더 다채롭고 황홀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히말라야는 모든 것이 포용된 조화와 환상의 세계다.





불경스럽게도 나는 랑시샤카르카로 들어가는 계곡을 걸어가며 여자의 몸을 연상했다. 그 중에서 반환점인 랑시샤카르카는 바로 절정의 순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웅장하면서도 미려한 6천 m급 설산의 파노라마 앞에서 나는 신음소리와 함께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산을 오르고 계곡을 깊이 들어오며 애쓴 고생은 이 하나의 순간으로 충분히 보상 받은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뒤쳐져서 힘들게 절정으로 걸어가는 일행들을 계속 만났다. 행렬은 걷는 능력에 따라 길게 늘어졌다. 나는 오늘 물 만난 고기처럼 에너지가 샘솟으며 선두에 서서 계속 걸었다. 마치 햇살 좋은 봄날에 들판으로 소풍을 나온 기분이었다. 그만큼 마음도 몸도 가벼웠다. 도중에 야외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기는 롯지나 식당이 없어서 가져온 포장 비빔밥에 물을 부어서 끼니를 해결했다. 난 역시 깨끗이 비웠지만 G는 속이 거북하다며 한 숟갈도 들지 못했다.






히말라야는 같은 풍경이라도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느낌이 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하루 종일 한 장소에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오늘은 같은 길을 왕복하고 있지만 오전과 오후의 느낌은 마치 새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달랐다. 전체 랑탕 트레킹 중에서 나로서는 이 길이 가장 아름답고 평화롭고 넉넉했다.




배낭을 메고 늘 내 옆에서 함께 했던 포터는 이름이 ‘샤니’라고 했다. 나이는 28 살인데 결혼해서 딸이 하나 있단다. 더 알고 싶은 게 많았으나 내 영어가 짧아 도시 대화가 되지 않았다. 네팔 사람들은 대부분 일상의 기본적인 정도는 영어로 대화가 가능해 보였다. 전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영향도 있고, 또 학교에서 정식으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내 나이를 알려주니 샤니는 놀라며 “Strong man!"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내가 봐도 오늘만은 그런 소리를 들을 만했다. 네팔 사람들은 실제 나이보다 얼굴이 더 늙어 보인다. 포터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40대 초반이었는데 내 눈에는 거의 60대 노인으로 보였다. 네팔 여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 일행은 모두 50대였는데 특히 여자들의 곱고 주름살 없는 얼굴은 네팔 여인들과 많이 대조가 되었다.


오늘은 평균고도 4천 m대에서 왕복 24 km의 길을 9 시간동안 걸었다. 사람들은 많이 피곤하고 힘들어했다. 그래도 낙오한 사람은 없었다. 캰진곰파에 돌아와 잠시 있으니 산봉우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잘 먹고 잘 걷는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고소체질이라며 부러워했다. 그냥 히말라야에서 롯지를 운영하며 눌러 살라고 한다. 혹 네팔의 젊은 처녀를 얻기까지 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고 놀렸다. ㅋㅋㅋ... 좋아라. 난들 어찌 그러고 싶지 않으랴.


저녁 식사 후 내일 일정을 논의하기 위한 전체 모임이 있었다. 원래는 4,984 m의 체르고리에 오를 예정이었으나 모두들 많이 지쳐 있어 좀더 낮은 4,484 m의 키모슝리로 바꾸자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논란 끝에 결국은 무리가 되더라도 체르고리로 강행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나 역시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욕심이 생겨 체르고리에 손을 들었다. 그런데 뒤에 가이드와 의논하는 과정에서 그 결정은 뒤집어졌다. 체르고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새벽 5시에 출발해야 하고, 현재의 우리들 체력으로는 서너 명 정도밖에 정상에 설 수 없을 것이라는 가이드의 협박성(?) 말에 단장의 마음이 약해진 것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모두가 오를 수 있는 키모슝리로 변경되고 말았다.


밤이 되니 춥고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오늘 너무 까불었는가 보다. 침낭 위에 이불 하나를 빌려 덮고 떨리는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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