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노선을 이탈한 버스 / 김선호

샌. 2012. 2. 14. 12:37

블라디보스톡에서 312번 신설동행 버스를 만났다

서울에서 기다릴 땐 좀처럼 오지 않던 노선 버스가

쓸쓸한 바람이 무차별적으로 불어오는 광장에서

말을 걸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자

노선표도 안 뗀 현대자동차 마크가 선명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중곡동과 신설동을 오고가는 순하디순한 글씨

쇄빙선이 깨어 놓은 얼음길을 따라

먼 바다를 건너오느라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다

날을 세운 바람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는 바람 사태에

바퀴는 단단히 부풀어 올랐다

이곳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불모의 땅으로 강제 이주당한

할아버지의 눈망울처럼 그렁그렁하다

생의 북쪽에 이처럼 따뜻한 기다림이 있냐고

신설동과 블라디보스톡 사이에서 잠시 망설이는 사이

버스는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

길이 시작되는 항구 블라디보스톡에서

 

     - 노선을 이탈한 버스 / 김선호

 

이번 여행길에 김선호 시인의 <햇살 마름질> 시집을 갖고 갔다. 마음에 확 다가오는 시는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시들이 잔잔하고 따뜻했다. 그중에서 이 시를 읽으면서는 몇 년 전 히말라야 트레킹을 위해 네팔에 갔을 때 한글이 적혀 있던 낡은 버스를 보았을 때의 느낌이 떠올랐다. 반가우면서도 뭔가 기분이 묘하고 쓸쓸했었다. 너무 착해서 가난한 네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아팠다. 시인이 블라디보스톡 여행 중에 느꼈던 감정과 어느 부분에서는 닮았을 것이다. 시인은 버스를 보며 나라를 잃고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우리의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탈과 상실의 쓸쓸함을 넘어 따뜻한 동질감을 느낀다. 어디서나 길은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벼운 농담 / 김동준  (0) 2012.03.02
아침 / 호치민  (0) 2012.02.24
별은 다정하다 / 양애경  (0) 2012.02.06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이면우  (0) 2012.01.31
방을 얻다 / 나희덕  (2) 201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