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명자나무 / 장석주

샌. 2008. 3. 13. 16:12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를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이라는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 명자나무 / 장석주

나를 찾아오는 어떤 손님도 기꺼이 맞아들이겠다. 불행 앞에서도 당당하겠다. 징징대지 않고 울지 않겠다.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않고, 고슴도치처럼 웅크러들지 않겠다.

술에 많이 취했었다. 자주 많이 울었었다. 어린 자식에게도 눈물을 보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헤프게 울지 않겠다. 차라리 진눈깨비 속에서 처절하게 울겠다.

얼마 뒤면 사무실 앞 명자나무도 붉은 꽃을 피우겠다. 올봄은 달의 뒤편에서도 명자꽃이 핀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 애상과 한숨으로 그 꽃을 바라보지는 않겠다.

쓸쓸히 걸으며 나는 더 배워야겠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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