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살이의꿈

조롱 속의 행복

샌. 2008. 1. 22. 16:50

새장의 새나 어항 속의 물고기를 볼 때마다 고개를 드는 의문이 있다. 저 새나 물고기는 과연 행복할까? 날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헤엄을 치지도 못하는 상태는 야생의 본능을 가진 그들에게 분명 스트레스로 작용할 것이다. 그것이 동물원의 동물을 우리가 측은하게 바라보게 되는 이유다. 그러나 대신 먹이를 구하는 어려움도, 적으로부터 받는 위협도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평화와 안온함을 누릴지도 모른다. 그런 갇힌 우리 속의 편안함이과연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롱 속의 행복이 참다운 의미의 행복이 되는가?

사람이 사는 목적이 행복에 있다고들 말한다. 행복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누구나가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조롱 속의 행복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의심을 하는 사람은 적다. 문자적 정의로서의 행복은 '욕구가 만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는 심리 상태'라고 되어 있다. 욕구의 만족이 행복의 전제 조건일 수가있지만,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다. 욕구의 만족에서 얻는 기쁨은 일시적이다. 욕구의 만족 뒤에는 곧 허무감이 뒤따르고 또 다른 목표나 욕구가 발동된다. 그러므로 욕구의 만족에서 얻는 행복은 영속적이며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되지 못한다.

행복은 결코 욕구의 충족이나 조롱 속의 자족에 머물러서는 얻어질 수 없다. 또 행복은 그런 상태에서의 안온함이 아니다. 내 자신이나 내 가족만이 잘 되고평안하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세상에 대한 관심과 근심이 행복의 전제 조건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의 마땅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의 지식인들은 우환의식(憂患意識)을 높이 샀다. 개인의 명리보다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할 일을 우선시했던 것이다. 식자우환(識者憂患)이라는 말은 꼭 부정적인 의미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즈음의 세상은 모든 선택의 기준의 자신의 이(利)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나보다는 세상과 우리를먼저 생각하는 의식이 너무나 부족해 보인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행복을 향해 쫓아가도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고작 조롱 속의 행복에 불과할 뿐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을 통해 보이는 하늘이 전부라고 안다. 조롱 속의 새는 그 속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다. 그런 새는 조롱 문을 열어주어도 밖으로 나갈 생각을 못한다. 어릴 때부터 줄에 묶어 키운 코끼리는커서도 말뚝만 있으면 그 말뚝 주위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줄을 말뚝에 묶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길들여진 것이 이런 동물들과 다름 없지나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도 그런 조롱 속의 행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더 넓고 높은 세계을 우리는 잃어버렸다. 행복은 결코 그런 일차원적인 만족은 아닌데 말이다.

이런 우스개소리를 들었다.

30년 동안 저녁마다 오로지 텔레비젼만 보던 남편이 어느 날 아내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정말로 근사한 일을 한번 해 봅시다!" 그러자 아내는 밖에서의 멋진 밤을 떠올리며 물었다. "어머나, 좋아요. 어떻게요?" 남편이 대답했다. "소파를 서로 바꾸어 앉아 봅시다."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에 갇혀 이렇게 한없이 작아진 남편 같은 사람들이 아닌지나 모르겠다. 조롱 속의 행복에 만족하며 크나큰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못하는....

 

 

'참살이의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사람의 혁명  (0) 2008.02.12
내 인생의 나이테  (2) 2008.01.27
누가 밀었어  (0) 2008.01.02
觀海難水  (0) 2007.12.14
믿음  (0) 2007.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