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8)

샌. 2007. 8. 24. 20:18



31년 전 이맘때에 나는 증평훈련소에 입소하여 대한민국 육군 사병 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해를 넘긴 뒤의 입대라 다른 사람에 비해 서너 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행동까지 굼떠 고생을 많이 했다. 비인간적인 기합을 받으며 내 일생에서 가장 서럽게 울었던 것도 그때였다. 계급 차이를 이용해 사람을 모욕하고 인격을 파괴하는데 쾌감을 느끼는 무리가 그 안에는 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당시의 사병 훈련은 인간의 자존감을 깔아뭉개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절대 복종하는 군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황당했던 경험은 훈련소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나는 머리 검사에서 불합격을 받고 구내 이발소에 가게 되었다. 군대 이발소 분위기가 살벌한 것은 당연했지만, 이발소 모습은 가치관의 전도를 일으킬 만큼 생소했다. 이발병들이 의자에 죽 앉아있고, 이발할 훈련병은 그 앞에 가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러면 기계로 그냥 쓱쓱 밀어버리는데 그것은 마치 인간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게 무릎 꿇고서 마지막 한 올까지 잘려 나가는 머리털을 보며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강제로 울에 갇힌 짐승 신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군대는 생각의 다양성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서울’이라고 답했다가는 서울이 다 네 집이냐며 기합을 받았다. 번지수까지 분명히 얘기해야 무사히 넘어갔다. 똑같은 획일적인 대답만이 유효한 집단이었다. 모두 똑같은 군복을 입히는 이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개성이나 개인적 특징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훈련소에서의 그런 쓰디쓴 경험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과정을 용케도 잘 견뎌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음의 에너지가 고통을 이겨내는 데에도 효과를 발휘한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기합은 선착순이었다. 철저한 경쟁의 원리에 따라 먼저 도착한 사람만 쉬게 하고 나머지는 끝까지 돌리는 기합이었다. 달리기를 못하는 사람은 죽을 고생을 해야 하지만 먼저 도착한 사람이라고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을 배려해주는 마음씨 같은 것은 아예 싹을 잘라버리려는 듯 조교들은 걸핏하면 이 선착순 기합으로 훈병들을 녹초로 만들었다. 어떤 때는 이 선착순 기합을 호되게 받고나서 전체가 목 놓아 울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군대생활 때만큼 눈물을 자주 흘려본 적이 없다. 그때 너무 자주 눈물을 흘려서 지금은 샘이 말라버린 것 같다.


훈련이 심할수록 훈련병들 사이의 동지 의식은 점점 더 강해졌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투 현장은 아니었지만 전우애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런 야비한 과정을 통해서 병사들 사이의 단결심은 더욱 단단해진 것이다. 조교나 지휘관들은 그걸 노렸는지도 모른다.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유도하고 그것이 어디를 향하게 만드는지가 우수한 지휘관의 자질일 것이었다.


여러 가지 슬픈 기억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훈련 막바지의 목욕탕 소동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훈련소는 시설이 열악하여 한여름이었지만 물뿌리개만 달랑 달려있는 간이 샤워시설만 있었다. 그것도 차지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러야했고 그냥 땀에 전 채로 자리에 드는 날도 많았다. 훈련병들에게까지 목욕탕 사용이 허용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훈련 마지막 날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해서 기쁜 마음에 비누와 수건을 가지고 목욕탕으로 갔다. 그런데 그 많은 훈련병을 하룻밤 사이에 목욕을 시키려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 최대로 수용하기 위해 탕 주위를 돌아가며 줄을 지어 정렬을 시켰다. 우리는 샤워기나 바가지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그냥 쪼그려있게 하고 탕 안에 들어간 몇 명이서 물을 퍼서 우리들 위로 뿌렸다. 그리고는 비누칠을 하라고 했다. 나는 미련하게 열심히 비누칠을 해 놓았는데 다시 물을 몇 번 뿌려주고는 나가라고 했다. 내 몸에는 허연 비누가 아직 그대로 묻어 있었는데 탈의실에서 비누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너무 황당해 아무 분노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도대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곳이었다.


그때의 놀랐던 경험은 내 뇌리에 박혀서 지금도 비누칠을 하고 샤워로 씻어낼 때면 수돗물이 꼭 끊어질 것만 같은 환상에 젖곤 한다. 군대를 제대한 지도 30년 가까이 되는데 아직도 그 망령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군대가 남자로서의 기질을 키워주고 일정 부분 긍정적인 역할을 한 측면도 있지만, 무조건적인 복종, 권위, 명령, 집단으로 대표되는 군대 문화는 한국 남자들의 의식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여러 악습이나 기이한 행태들의 많은 부분이 군대가 끼친 집단무의식의 영향 아래에서 잉태된 것일지 모른다. 성인 남자들 중에는 아직도 그런 군대문화에 향수를 갖는 사람들도 있다.


증평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던 도중 판문점 도끼 사건이 터졌다. 만약 전쟁이 터진다면 우리가 아마 총알받이로 맨 먼저 전선에 투입될 거라면서 굉장히 뒤숭숭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전반기 교육을 마치고 이등병 계급장을 받았을 때는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모두들 엉엉 울면서 각자 배치 받은 부대로 떠나며 헤어졌다.


나는 동두천 28사단에 배치되어 다시 후반기 교육을 받았다. 한여름을 증평에서 보내고 겨울은 동두천에서 맞았으니 세 계절을 훈련병으로 보낸 것이다. 새벽이면 기상나팔 소리에 일어나 줄지어 부대 옆에 있던 개울로 세수하러 갔던 기억이 새롭다. 11월이 되어서는 첫눈을 맞았다. 이 사진은 동두천에 배치되어 후반기 훈련을 받을 때 찍은 것이다. 그래도 이때는 사진이라도 찍을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얼굴은 가뭇하지만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옛 동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울타리에 갇혀 있었던 젊음의 혈기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시간은 꿈결같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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