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품위 있는 죽음

샌. 2005. 12. 27. 10:50

<사례 1>

동료의 부친 되시는 분이 암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을 마다시고 5개월여 생존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일흔이 넘으신 연세에 그분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신 것이다. 아마 수술을 했다면 몇 년은 더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자식들이야 수술 하시기를 강권했지만 본인이 극구 반대하셨다고 한다. 암 말기의 고통은 진통제로 완화시키며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셨다.


<사례 2>

어느 집 어머니가 역시 암에 걸리셨다. 역시 많은 연세 탓에 수술 여부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자식들이 수술을 시켰고, 어머니는 지금 두 해째 계속 항암 치료를 받고 있지만 거동도 못할 정도로 악화되고 있다. 간병 문제로 자식간에 알력이 생겨 지금은 형제간의 의에 금이 가버렸다. 수술을 강력히 희망했던 딸들도 이젠 나 몰라라 하고, 어머니는 본인 몸의 고통에다 자식들의 불화가 겹쳐 이중고를 겪으신다고 한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것은 어느 자리에서 동료들로부터 들은 얘기 중 일부이다. 추하게 인생의 끝을 맺음 할 수는 없다는 얘기 중에 나온 것이다.

얼마 전에는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여자는 81세, 남자는 74세로 발표되었다. 10년 전에 비해서 약 5년 정도씩 증가한 꼴이다. 이렇게 된 것은 생활이나 영양 조건의 개선, 그리고 의료 기술의 발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우리나라도 이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것은 노인 질병이나 죽음 같은 노년 생활의 질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즉 얼마나 품위 있고 인간적인 죽음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 보인다. 고통을 받으며 자식에게도 짐이 되는 마지막은 모두에게 두려운 것이다.

인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라도 생전에 사고나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고 하늘로부터 받은 몸과 정신을 온전히 보전했다가 편안히 저 세상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아마 그런 사람이 가장 축복받은 사람으로 보인다.

스콧 니어링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는 100세 가까이 살며 하늘이 준 자연적 수명을 온전히 누렸다. 마지막 순간 자신의 생이 다한 것을 알고는 스스로 곡기를 끊은 채 의식이 온전한 채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또렷하게 의식하며 저 세상으로 건너갔을 것 같다.


그러나 아직은 이런 복 받은 사람보다는 불가항력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인간성의 고귀한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장일순 선생님이 암으로 고생하실 때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 두어 시간씩 자신들의 푸념을 늘어놓고 가도 일절 성가시다는 내색 한 번 없었다고 한다. 어느 사람이 투병하시는데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냐며 위로의 말을 건네자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투병이라니? 뭐하고 싸운단 말인가? 암세포는 내 세포 아닌가. 잘 모시고 의논하면서 가야지.”

암을 적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손님으로 대하는 자세는 누구나 흉내 낼 수 없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경지까지 올라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처럼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다.


삶에 대한 집착이 생명체의 본능이라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노추(老醜)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늙어서까지 물욕에 집착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늙어가면서 제발 험한 꼴 당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것이 불가피하다면 죽음 앞에서 당당하고 싶다. 신(神)이 나에게 준 시련이며 운명으로 감사히 받아들이고 싶다. 아등바등하지 말고 초연해질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면 좋겠다.


내가 아는 수도자 한 분은 간암 판정을 받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매우 힘들어 하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 2년 정도 동안 신앙에 의지하기 보다는 대체 의학이나 민간요법에 밖의 사람들이 볼 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의존하셨다. 책도 여러 권 쓰시고 강단에서 비움과 하느님의 뜻을 강론하시던 분이 막상 본인에게는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왕 가실 것, 차라리 초탈한 모습을 보여 주셨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만약 내가 암과 같은 불치의 병에 걸린다면 그때가 되어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자신할 수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범인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이라면 남은 기한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인생을 정리하고 싶다. 아쉽고 감사한 부분들이 무척 많을 것 같다. 단, 현대 의술로부터는 고통을 제거하는 도움만 받고 싶다. 제일 무서운 것이 본인뿐만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을 가슴 조리게 하는 통증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내가 유언을 쓴다면 품위 있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가족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몇 달이나 몇 년 더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결코 서로를 위하는 길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나는 안락사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술이 단순한 생명 연장보다는 인간이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향으로 변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죽음 - 모든 종교나 철학의 교설들이 결국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의 문제는 모든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죽음의 공포와 영원에 대한 소망이 종교의 본질이기도 하다.

과학은 생명 연장을 찾고 죽음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이는 각자의 믿음이나 가치관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품위 있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마음 훈련이 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의 내 삶이 중요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이다.


나는 내 마지막 날들이 평온하고 밝고 내적 평화로 가득하기를 기대한다. 비록 고통 중에 죽게 될 처지가 되더라도 그걸 운명으로 감사히 받아들이게 되길 기대한다. 되도록이면 의식이 명료한 가운데 세상과 또 사랑했던 사람과 결코 슬프지 않은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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