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아차산에 오르다

샌. 2005. 2. 12. 19:41

설을 고향에서 보내고 온 뒤로 하루를 푹 쉬었건만 몸은 천근같이 무겁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여간 힘든 노릇이 아니다. 예전과 달리 이젠 고향에 내려가도 부모님이나 친척 분들 대개가 연로하시고 병마에 시달리시기 때문에 마음마저 편치 않다. 자격지심인지 몰라도 명절이라고 내려가건만 자식 도리 못하는 걸 확인하는 절차 같아서 회한만 더해서 돌아오곤 한다.

 


 

오늘은 더 피곤해하는 아내를 억지로 앞세우고 아차산에 오르다. 아차산은 서울의 동쪽 끝에 있는 산으로 집에서 20분이면 걸어 도착할 수 있다. 해발 300m 정도로 높지 않은 산이기 때문에 가볍게 등산하기에 좋다. 처음에는 어떻게 올라갈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조금 걸으니 몸이 풀리고 발에 힘이 생긴다. 날씨가 풀린 토요일 오후라 등산로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올 겨울은 눈이 거의 안 내려서 땅은 매우 건조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른 먼지가 풀풀 날린다.

 

아차산 정상에는 옛 고구려군의 보루 유적지가 있다. 1500년 전 이곳이 고구려의 최전방 초소였다. 바로 밑으로 보이는 한강을 경계로 해서 백제와 쉼 없는 전쟁을 벌인 곳이다. 유적지는 발굴이 끝난 뒤 다시 복토를 해서 지금은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고 있다. 지금 내가 밟고 서 있는 이 자리에서 1500년 전 고향을 떠나온 어느 고구려 병사가 보초를 서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고향에는 아마도 늙은 노모와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을지 모른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사람은 바뀌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산은 그대로이고 한강도 그 자리를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1500년 뒤의 세상은 어떠할까? 그때도 과연 사람들은 지금처럼 산을 찾고 그리워하고 꿈을 꿀까? 1500년 전이 그러했듯 그때도 여전히 땅에다 금을 긋고 피를 흘리며 전쟁을 벌일까?

 

멀리서 바라보는 서울은 아름답다. 푸른 녹지 대신 너무 많은 아파트 숲이 답답하지만 그래도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답다. 그건 사람이나 사물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너무 가까이 다가서다가 실망하거나 눈물을 흘린다. 무엇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용마봉을 거쳐서 면목동으로 내려오다. 면목동은 결혼 초기에 살던 마을이다. 그때 살던 집을 찾아갔지만 그러나 매일 다녔던 골목길조차 알아볼 수가 없게 변했다. 지도를 확인하고 묻고 해서 겨우 옛집을 찾아갔는데 이미 집은 헐리고 그 자리에는 교회가 들어서 있다. 비단 여기뿐이 아니라 내가 서울에서 살던 흔적들은 이미 어디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지금 시작되고 있는 서울 개조작업이 끝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 자취들을 잃게 될 것이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 그것이 발전이고 진보인지 모르지만 뭔가 마음 속에 들어있던 소중한 보물을 잃은 듯한 상실감은 어찌할 수 없다. 아무래도 현대인은 물리적 고향과 함께 마음의 고향까지 앗기는 유목민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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