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에 봄기운마저 느껴진다.
그동안 쉬고 있던 자전거를 닦고 기름친 다음에 한강으로 타러 나간다.
그러나 강변의 바람은 의외로 차다. 가만 있으면 따스한데 달리면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손이 시럽고 눈에서는 눈물도 나온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하다.
도시의 가운데에서그나마 강변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서울의 동과 서를 완전히 관통할 수도 있고, 또 각 지천을 따라서도 자전거 여행을 할 수가 있다.
욕심이라면 이런 자전거 도로가 일반 거리에도 되어 있어서 누구나 손쉽게 자전거를 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의 인구 밀도가 높고 길이 워낙 복잡하다 보니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나 앞으로의 교통 정책은 자동차 중심의 구조에서 바뀌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편리하게 자전거를 탈 수 있다면 근거리 이동은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그만큼 차량은 줄어들고, 거리는 훨씬 더 여유있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할 것 같다.
잠실까지 간 다음에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탄천(炭川)을 따라 올라가 본다.
탄천은 아직까지도 오염의 대명사이다.
겨울인데도 악취가 심하고, 물 색깔은 이름 그대로 새까맣다.
누군지 이름을 썩 어울리게도 붙여 놓았다.
안내판에 보니 탄천의 원래 이름은 `숯내`였다고 한다.
강원도 지역에서 한양으로 땔감을 실어온 다음에 이곳에서 숯을 만들었다는데, 그 숯가루가 흘러내려 검은 내가 되었고 그래서 이름을 `숯내`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이름만 변했을 뿐 내의 색깔은 예나 지금이나 똑 같다.
다만 지금은 온갖 문명의 찌꺼기로 인해 죽은 내가 된 것이 안타깝다.
그 와중에도 오리들은 썩은 물 위를 헤엄치며 먹이를 찾고 있고, 몇 몇 사람들은 낚싯대를 던지고 있다.
탄천에는 또 이런 전설도 있다.
염라대왕이 저승사자에게 18만년(三千甲子)이나살고있는 동방삭(東方朔)을 잡아 오라고 했다.
저승사자가 지상에 내려 왔으나 동방삭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방삭이 호기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는 이곳 탄천에서 숯을 빨래 빨듯이 물에 씻음으로써 유인하고자 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왜 숯을 빠느냐고 물었고, 하얗게 만들려고 그런다고 하자 웃으면서 "내가 삼천갑자를 살았어도 숯을 빠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해서 미끼에 걸려든 동방삭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탄천의 숯과 동방삭을 연결시켜 놓은 것이 흥미롭다.
이번에는 탄천에서 갈라져 양재천(良才川)으로 길을 잡는다.
양재천은 서울 강남을 관통하는 작은 내인데 당국의 노력에 의해 수질도 좋아졌고 주변의 시설도 시민들이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해 놓아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곳이다.
여름이면 아이들이 물 속에 들어가 논다고도 한다.
그러나 겨울에 보는 내의 바닥은 청색의 이끼들로 가득 덮여 있다. 그래도 상태는 다른 내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편이다.
한 굽이를 도니 눈 앞에 우람한 성채가 나타난다.
그 유명한 타워 팰리스 아파트 군이다.
그 위용이 정말 대단하다.
별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주눅들게 한다.
옆에 있는 15층짜리 아파트는 꼭 헛간같이 보인다.
유별나게 일등을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는 한 기업이 지어서 분양했다고 한다.
최고의 사람들이 사는 최고의 주거 공간이라고 했던가 뭐던가, 그놈의 최고병 때문에 최고가 되지 못한 사람들 많이 기죽여 놓았다.
누군가가 저것을 거대한 남근(男根)으로 묘사했다.
가까이서 실물을 보니 그 비유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속에 은유적으로 숨어있는 폭력성이 보일 것도 같다.
하여튼 저 타워 팰리스로 상징되는 현대의 물신 추구와 고대의 남근 숭배를 연관시킨 사고가 재미있다.
또 한 사람이 생각난다.
이분은 지금 시대에 중산층으로 배 따스게 사는 것이 부끄럽다며 무척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자본주의를 천박하고 폭력적이라고 규정했다.
넓은 창가에서 아래쪽 판자집을 아무 거리낌없이 바라보며 꼬냑을 들이키는 낯 두꺼운 부자가 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가난이 더 낫다는 그의 말은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위에는 빈곤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아니 그 비율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데 국가적인 관심이나 보살핌은 많이 부족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체제 자체가 그리고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들이 이런 계급간 계층을 자꾸 심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자전거를 되돌려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세상의 수레 바퀴가 돌아가는 관성은 너무나 엄청나 그것을 세우거나 방향 전환을 하려는 어떤 시도도 헛되어 보인다.
도시에서의 산책은 가끔 이렇게 맥 빠지는 상념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