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지나가게 된 날, 시간 여유가 있어 행궁에 들렀다. 2012년에 복원이 끝났는데 찬찬히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겨울 평일이라 관람객도 거의 없이 한산했다. 티켓을 끊으니 준 안내 팸플릿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남한산성은 전체 길이가 약 12km에 달하는데, 신라 주장성의 옛 터를 기초로 하여 인조2년(1624)에서 인조4년(1626)까지 대대적으로 축성되었다. 남한산성 행궁 역시 축성과 함께 인조3년(1625) 상궐과 하궐이 건립되었다. 작년에 남한산성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남루(漢南樓)는 행궁의 정문으로 정조22년(1798)에 광주 유수 홍억이 건립했다. 한남(漢南)은 한강 남쪽 성진의 누대라는 뜻이다. 앞뒤로 8개의 주련이 있다.
한 성을 지킴에 용과 호랑이의 비법으로
백리 지역을 지키며 맹수와 같은 용사를 보도다
훌륭한 관리는 임금님의 은덕을 널리 퍼뜨리고
대장군은 아랫사람을 위엄과 인의로 다스리네
이 땅에서 잠업(蠶業)과 보장(保障)을 겸하지만
한가한 날에는 노래하며 투호놀이도 한다네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
외행전(外行殿)은 하궐의 중심 건물로 정당(正堂)이라고도 하였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물인데 이 자리에서 통일신라 관련 유구들이 발굴되었다. 병자호란 당시에 외행전 기둥에 포탄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얼마나 아수라장이 되었을까 짐작이 간다.
내행전(內行殿)은 임금의 침전이다.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은 온돌방과 마루방으로 되어 있다. 내행전은 임금의 안위를 위해 담으로 둘러쌓았다.
좌승당(坐勝堂)은 광주 유수의 집무용 건물이다.
후원에 있는 이위정(以威亭)은 순조17년(1817) 광주 유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심상규가 짓고 추사가 쓴 이위정기가 전한다.
"내가 여기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호시(弧矢)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 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이찌 천하를 위복(威服)하지 않겠는가!"
좌전(左殿)은 유사시 종묘의 신주(神主)를 옮겨 봉안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이다. 병자호란을 통하여 남한산성의 보장처로서 기능이 입증되자, 숙종37년(1711)에 부윤 김치룡이 건립하였다. 서울 종묘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 2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행궁(行宮, Emergency Palace)이란 왕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행궁은 20여 개로 전 시기에 걸쳐 조성되고 이용되었는데, 능행, 전란, 휴양 등을 목적으로 한다. 이중 남한산성행궁, 북한산성행궁, 강화행궁 등이 전란을 대비하여 건립한 행궁이다. 인조14년(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항전하였다.
남한산성 행궁은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이 능행길에 머물러 이용하였고, 특히 정조는 남한산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남한산성 사대문 이름을 짓고, 과거시험도 시행하였다. 정조19년(1795)에는 광주부와 수어청의 이원적 관리체계를 일원화하여 광주유수부로 승격하고, 서울 외곽을 책임지는 군사요충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옛날 건물은 하나도 없고 전부 복원한 것 뿐인 게 아쉬웠다. 일제에 의해 행궁만 아니라 남한산성에 있던 사찰도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 겨우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전에는 여기에 남한산성 호텔이 있었고, 가끔 커피숍을 찾아 차를 마시기도 했다. 그때는 이곳이 행궁 자리인지도 몰랐다. 뒤로는 민가가 어지럽게 있었고, 산 아래는 버려진 땅이었는데 이렇게 말끔하게 정리되니 보기가 좋다. 다음에는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다시 관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