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토리노의 말

샌. 2015. 7. 24. 09:49

 

외딴곳에 아버지와 딸이 살고 있다. 밖은 거센 바람이 불고 건조하다. 종말적 상황이다. 둘은 집안에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한쪽 팔을 못 쓰는 아버지의 옷을 입혀 주고, 감자 한 알을 먹고, 남는 시간은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본다. 한 마디 대화도 없다. 관성적인 절망의 몸짓이다.

 

나는 이 영화를 인류 종말에 관한 보고서라 생각하며 보았다. 핵전쟁이든 기상이변이든 종말의 때가 닥쳤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우물의 물마저 말라 버리자 짐을 싣고 다른 데로 옮기려 하지만 폭풍으로 얼마 가지 못하고 돌아오고 만다. 철저히 고립되었다. 나중에는 램프도 켜지지 않는다. 기름이 있는데 불이 붙지 않는 건 산소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다. 핵겨울이 닥치기 전 지표면의 대형 화재 탓일 것이다.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인 이들 부녀도 결국 마지막을 맞는다.

 

종말을 그린 영화 중에서 '토리노의 말'은 특별하다. 세상이 왜 종말을 맞게 되었는지는 아무 설명이 없다. 오직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된 두 사람의 모습만 보여준다. 그것이 천만 근의 무게로 다가온다. 보기에 따라서는 지루한 흑백영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을 영화다. 그때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찾아오고, 무언지도 모르면서 세상은 끝난다.

 

이 영화 '토리노의 말'을 다른 시각에서 볼 여지는 충분하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니체 이야기가 나온다. 마부의 채찍에도 꼼짝하지 않는 토리노의 말을 보고 니체는 울었다. 그 뒤부터 니체의 광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감독이 그리려는 것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다른 메시지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쪽에 더 무게가 간다. 먹기를 거부하는 말은 확실히 두 사람과 대비된다.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의미를 떠나 나는 이 영화를 종말에 관한 사실적 묘사로 이해해도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그 무엇이 닥쳤을 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어떤 시도도 무의미한 극한의 절망이 있다. 두 사람이 아니라 이웃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충격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이 견뎌내야 할 종말의 때는 이러할 게 분명하다. 태어나지 않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 현실이 되는 미래는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덮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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