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5년 정월에 제나라 왕 한신을 옮겨서 초나라 왕으로 삼고 하비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한신은 초나라에 이르자 일찍이 밥을 먹여 주었던 무명 빨래를 하던 아낙을 불러 1000금을 내렸다. 또 하향의 남창 정장에게 100전을 내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소인이다. 남에게 은덕을 베풀다가 중도에서 그만뒀기 때문이다."
또 자기를 욕보인 젊은이들 가운데 자기에게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게 하여 모욕을 주었던 자를 불러 초나라의 중위로 삼고, 여러 장군과 재상에게 알렸다.
"이 사람은 장사일지니, 나에게 모욕을 주었을 때에 내 어찌 이 사람을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하더라도 이름이 드러날 것이 없기 때문에 참고 오늘의 공을 이룬 것이다."
- 사기(史記) 32, 회음후열전(淮陰候列傳)
한신(韓信)은 젊었을 때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건달이었으나 밥을 빌어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 진나라 말기에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한신은 항우 진영에 들어갔으나 인정 받지 못하고 유방한테로 갔다. 거기서 소하의 추천으로 일거에 대장군에 오르며 그의 잠재된 능력을 발휘한다. 아무리 오합지졸도 한신이 지휘하면 정병이 되었다. 한신이 아니었다면 유방의 천하통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장군이며 군사 전술가로서 한신의 능력은 전쟁사에서 어느 누구보다 우뚝하다. 배수진을 치고 싸운 조나라와의 정형전투는 특히 유명하다. 한신은 심리전의 달인이기도 했다. 한신은 공로를 인정 받아 제나라 왕이 되었다가 항우가 죽은 뒤에는 초나라 왕이 되었다. 이 대목은 그가 초나라 왕이 되자 젊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을 잊지 않고 보답한 이야기다. 동시에 그에게 과하지욕(跨下之辱)의 모욕을 가한 자에게는 복수 대신 벼슬자리를 주며 아량을 베풀었다. 작은 모욕을 참은 결과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게 되었다는 의미다. 한신의 인간됨을 알아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지휘관으로서 한신은 뛰어났으나 처세술에서는 미숙했던 것 같다. 또한 따르는 군사가 많으니 유방으로서는 위협을 느꼈을 만하다. <회음후열전>을 읽어 보면 한신이 모반을 꾀했다고 하나 유방이 처놓은 덫에 한신이 걸려든 것 같다. 그는 초나라 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된 뒤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했다. 이번에도 악역은 여태후였다. 한신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아녀자에게 속은 것이 어찌 운명이 아니랴!"
한신이 제나라 왕이었을 때 괴통은 한신에게 힘이 충분하니 유방과 맞서서 천하를 쟁취하라고도 충고했다. 이때 한신은 유방과의 의리를 내세우며 제안을 물리쳤다. 토사구팽 당하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신은 괴통의 계책을 쓰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제대로 모반도 못 해 본 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이다. 만약 괴통의 말을 따랐다면 한신, 항우, 유방의 또 다른 삼국지가 전개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세를 보건대 유방이 제일 먼저 쓰러지고, 한신과 항우의 결판으로 대세가 결정되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