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부터 설사가 많이 나와서 오늘 못 나가겠다고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노년이 되니 이런 식의 약속 어긋남이 자주 있다. 수시로 몸에 탈이 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외출하려고 준비중이었는데 그냥 집에 있기도 뭣해서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산야는 봄의 신록으로 물들고 있다. 이때의 숲 색깔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특히 신록의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연두빛은 너무나 신비하다. 그윽한 생명의 색이다. 이제 막 옹알이를 하는 아기의 얼굴에 서린 미소 같은 것, 부드러움의 완전체 같은 것. 사진으로는 이 색깔이 전해주는 느낌을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


성곽길을 걸을 때 곁을 스쳐가는 꽃들과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제비꽃이 반겼다.



개별꽃, 양지꽃, 붓꽃, 진달래, 애기똥풀, 현호색.


남한산성 소나무 숲은 지난 겨울 폭설로 크게 훼손되었다. 가지만 아니라 줄기가 통째로 꺾인 나무가 많았다. '눈 폭탄'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이런 광경은 수십 년간 남한산성을 찾은 이래 처음 본다. 숲 이곳저곳에서는 부러진 나무를 정리하는 전기톱 소리가 요란했다.

혼자 산길을 걸으면 산, 숲과 하나가 될 수 있어 좋다. 사람과 섞이면 어수선한 말소리에 자연이 멀어진다. 새소리를 들을 수 없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의 감각도 놓친다.



낮 기온이 27도까지 올라갔는데 오랜만의 산길 걸음과 더해 무척 힘이 들었다. 마지막 내리막에서는 종아리가 당겨서 어리둥절했다. 이 정도 걸음으로 다리 근육이 놀라다니, 재충전할 필요를 느꼈다.
'산길샘' 앱으로 체크해 보니 7.7km를 3시간여 걸었다. 약속이 끊어진 덕분에 생긴 귀한 산길 걷기였다.

'사진속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주 출렁다리와 금은모래강변공원 (1) | 2025.05.03 |
---|---|
초록 뒷산 한 바퀴 (0) | 2025.04.29 |
되새의 죽음 (0) | 2025.04.18 |
닷새간 어머니와 지내다 (1) | 2025.04.16 |
다산생태공원의 봄 (0) | 2025.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