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이것이었다. “퇴직하면 무슨 일을 할 계획인가요?”은퇴 후에도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 대동소이하다. “뭘 하고 지내나요?” 아무 일 하지 않으려고 일찍 퇴직을 했는데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대략 난감이다. 사람들은 일 없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대해 못 미더워한다. 그래, 지금은 큰 소리 치지만 좀더 지내봐라, 남는 시간 못 견딜 걸, 대체로 그런 눈치다.
가끔은 산에 다니고 꽃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그건 일이 아니라 취미라고 한다. 매일 그렇게 보낼 수는 없으니 뭔가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 있어야 된다고 말한다. 일을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경우라면 어쩔 수 없이 또 일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분히 여유가 되는 사람도 관성에 의해 일에 매달리는 경우를 본다. 사람들이 말하는 일은 대개 자신을 외적으로 통제해주는 장치를 말한다. 그런 일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지 안타깝다. 성숙된 인간이란 일 없이도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얼마 전에 회사에서 돌연 퇴직을 하게 된 지인 가족 이야기를 들었다. 나이가 60이 가까우니 퇴직이 곧 닥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짐을 싸가지고 집에 들어오는 날 온 가족이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불쌍하다면서 딸이 제일 서럽게 울더란다. 아내는 남편의 퇴직 후 몇 달 동안 몸무게가 부쩍 줄었다고 한다. 집안 분위기가 이렇다면 당사자는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직 일에만 매달려온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자신의 삶을 찾거나 퇴직 이후를 창조적으로 설계하는 데는 너무나 서투르다. 그런 상태에서 퇴직은 곧 심리적 공황을 야기한다. 활기를 찾기 위해서는 다시 새로운 일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집은 지금 가장에게 새 일을 찾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한다.
주변에는 최근에 퇴직한 사람이 셋이 있다. A는 몇 년 전만 해도 퇴직하면 부모님이 계신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작년 말에 회사를 퇴직하더니 친척 소개로 새 일터를 구했다. 왜 처음 약속을 안 지키느냐니까 놀면 뭣 하냐, 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B는 방통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당구도 배우러 다닌다. C는 자전거를 배우러 매일 올림픽공원에 나간다. 돈 되는 일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지만 다들 무언가에 소속돼 열심히 산다. 태평하게 지내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일은 필요하다. 예술 계통의 창조적인 분야라면 더욱 좋다. D는 1년 과정의 연극교실에 다니고 있다. 60이 넘은 나이에 연극을 시작하다니 대단하다. 나도 언젠가는 새로운 시도의 필요성을 느낄지 모른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욕구가 강하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 집에서 놀기 넉 달째, 그러나 아직은 아무 일 없이 빈둥대는 게 좋다. 작년에는 한때 명리학 공부를 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명리학에 대한 기초 책을 몇 번 읽어보고는 내 취향이 아님을 알았다. 지금은 배워 보고 싶은 게 별로 없다. 사람들로부터 이게 좋다, 저게 좋다, 추천은 여럿 받았지만 내키지 않는다. 이사를 가게 되면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고 싶다.
어제는 전 직장 동료들이 집 부근으로 찾아왔다. 퇴직을 하고보니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이 참 중요하다고 느낀다. 지금까지는 주로 일과 업무를 중심으로 사람들과 만났다. 보기 싫은 사람과도 어쩔 수 없이 접촉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해관계가 아니라 같은 취미나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을 주로 만나게 된다. 집단의 성격이 달라진다. 옛 동료에게서도 직장에 같이 있었을 때는 보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그게 어쩌면 더 진실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퇴직할 때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느낀 게 많았다. 내가 사람들을 얼마나 오해하고 잘못 보고 있었는지 많이 반성했다. 일을 떠나고 보니 안 보이던 게 보이게 된다.
일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더없이 지루해질 때까지 일 없이 지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 경험 없이 그저 시간을 죽일 일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싶지 않을 뿐이다. 무료함의 늪 바닥까지 내려간 다음에는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게 되겠지. 그것이 무엇일까? 아마 두 번째의 귀농 시도가 되지 않을까, 나는 다가오는 미래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