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만인에게 공평하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강자에게는 너그럽고, 약자에게는 엄격하고 가혹하다. 법원 출입을 해 보면 안다. 힘 있는 사람은 잘도 빠져나가는데, 빽도 돈도 없으면 적진에 떨어진 혈혈단신의 신세가 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절규가 나에게도 해당할 수 있다. 세상 현실이 그렇다.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약자의 편에 선 사람이 있다. 전직 기자였던 박상규 씨와 박준영 변호사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또는 하고 있는 사람을 위해 재심을 신청하고 무죄를 이끌어낸다. <지연된 정의>는 두 사람이 재심 프로젝트를 통해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책에는,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 사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 기사 살인 사건, 완도 무기수 김신혜 사건 등 세 사례가 나온다. 앞의 둘은 1999년과 2000년에 발생한 살인 사건이다.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조작되어 형을 살았다. 두 사람은 자비를 들여 발로 뛰며 재심을 이끌어내고 무죄를 받아냈다. 억울한 피해자의 한을 풀어주고 죽었던 정의를 살려낸 것이다. 마지막 사건은 현재 진행중이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사건을 재심을 통해 무효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의 안정성을 내세우며 법원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드물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의 처지를 연민하면서 사회 정의를 세우려는 곧은 의지가 아니고서는 끝까지 추진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두 분은 우리 시대의 의인이라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자신을 희생하며 애쓰는 이런 분들이 있기에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나마 덜 비틀거린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억울한 피해자를 만든 당사자는 자신의 과오를 덮으려고만 한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이 진범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진실을 외면한다. 자신이나 조직에 돌아올 피해가 두려운 것이다. 용기 있는 두 분의 재심 프로젝트는 관행적인 사법 절차에 경종을 울리는 의미도 있다. 경찰이나 검찰, 법원 모두 더 신중하면서 절차에 맞는 사건 처리를 하게 될 것이다.
책에 소개된 박준영 변호사의 프로필은 이렇다.
"땅끝에서 배를 타고 30분 들어가야 하는 섬 '노화도'에서 태어났다. 가출을 자주 하며 왕십리 프레스 공장, 동인천 정비 단지에서 '꼬마'로 일했다. 군 제대 후 한 달 선임 배 병장과 함께 신림동 고시촌에 무작정 들어가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1점 차'로 합격했다. 학력, 경력, 인맥이 딸려 사건 수임이 어려웠다. 불가피하게 국선을 많이 하게 됐고, '국선 재벌'로 불리기도 했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사건을 많이 하다 보니 '법은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을 나도 모르게 갖게 되었다. 형사 사법 피해자들의 재심 사건에 관심이 갔고, 언제부턴가 전념하게 됐다."
사회 운동에 나서는 사람은 기본 기질이 다른 것 같다. 타인의 아픔에 예민하고 공감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에 제 이익을 채우기 위해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 것도 못 보는 사람도 많다. 박상규 씨를 설득하기 위해 박 변호사가 했다는 이 말이 책을 덮은 뒤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변호사나 기자나, 그냥 보면 안 보이는 걸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줘야 해요. 당신이나 나나, 그런 거 해야 해요. 안 보이는 걸 보여 줘야지....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