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외국 사는 자식이 효자다

샌. 2019. 4. 19. 11:26

올해는 손주 돌보는 일에 매이게 되었다. 제 어미가 자격증을 따기 위한 교육을 1년간 받게 되어 손주를 유치원에 보내고 맞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아침에 버스에 태워 보냈다가 오후 3시에 받으면 저녁 시간까지 맡아봐야 한다. 부부가 함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손주 돌보미는 우리 나이 또래가 대부분 겪는 일이다. 자식이 맞벌이를 하면 제일 크게 부딪히는 문제가 육아다.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데가 조부모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잊을 만하면 TV에서 보모의 아동 학대 영상을 보여주니 도무지 남에게 맡길 수 없다 한다. 자식의 요청에 거절할 수 있는 부모가 있겠는가. 겉으로는 손주가 이뻐서 괜찮다지만 과연 속까지 그럴까.

 

며칠 전 지인이 하는 불평을 들었다. 딸이 쌍둥이를 뱄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나면 직장에 나가겠다고 하니, 쌍둥이 손주 키우기가 지인의 몫으로 돌아오게 생겼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친정어머니에게 맡기는 게 대세다. 손주를 보게 된 것은 축복이지만, 하나가 아니고 둘이나 돌보려니 부담이 되는 건 어찌할 수 없다. 피하고 싶지만 도리가 없다. 사돈네와 분담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게 고작이다. 60대 중반인 지인이 손주 돌보기를 끝내면 인생의 황금기는 지나가고 말 것이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힘들어하는 자식을 못 본 척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아내는 전업주부였으므로 두 아이를 제 손으로 길렀다. 양가 부모 도움은 출산 때만 잠깐 받았다. 그런데 세상은 변해서 이젠 손주를 봐주는 게 거의 의무 사항이 되었다. 자식도 의례 당연히 여기고 손주를 맡긴다. 퇴직하고 일에서 떠나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자식은 가만 두지를 않는다.

 

손주 보는 재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 맛 때문에 사는 낙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리하다가 골병이 들기도 한다. 오죽하면 손주 보기보다는 오뉴월 땡볕에서 일하는 게 낫다 하겠는가. 자식에 대한 애프터 서비스를 죽을 때까지 하는 종족은 인간밖에 없다. 제 새끼는 제가 키워야 하지 않느냐는 주장은, 요사이 손주 안 봐 주는 집이 어디 있느냐는 현실론에 막히고 만다.

 

우리는 그나마 다른 집에 비하면 제약이 덜 할 편이었다. 가까이 사는 둘째가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워왔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손주를 맡게 되면서 내 불평이 늘어났다. 아내는 초지일관 자식 편이다. 우리가 안 도와주면 어떡 하냐고, 손주 크는 건 잠깐이라고 말한다. 어찌할 수 없음은 알지만 영 마땅찮다. 퇴직 이후 인생 설계에 발목이 잡힌 건 자식 때문이었다. 처성자옥(妻城子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부모 자식 관계라는 올가미는 연수가 지나도 풀어질 줄 모른다.

 

효자란 별게 아니다. 부모가 부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만 놔두는 게 효자다. 그런 점에서 멀리 사는 자식이 효자다. 요사이는 전국이 일일생활권이라 국내에 있으면 별 효과가 없다. 외국에 나가 사는 자식이 제일 효자다. 꼭 부모만이겠는가, 자식 입장에서도 부모의 간섭이나 부양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홀가분하지 않겠는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부모 자식 사이에 가능하면 접촉을 덜 하는 게 상책이다. 어찌할 수 없는 물리적 거리로 떨어진, 외국에 사는 자식이 제일 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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