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사전>의 후편이라 할 수 있다. 김소연 시인은 언어와 사물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사전에 나오는 한 글자로 된 낱말을 시인의 예리한 촉수로 더듬어 본 결과물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미소 짓게 하고, 무릎을 치게도 한다.
낱말을 재정의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열어보이는 일이다. 시인을 따라 시늉을 내보지만 이내 벽에 막힌다. 평시에 주변과 내면을 관찰하고 주시한 내공이 쌓이지 않는다면 버거운 작업이다. 책 한 권 분량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작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전편과 비교하자면 <한 글자 사전>은 집중도에서 <마음 사전>에 미치지 못한다. 이 책이 부실하다기보다 전편의 감동이 워낙 컸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한 글자'지만 여러 의미를 가진 단어들의 산만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책에 나오는 몇 단어를 옮겨 본다.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시인의 선명하며 따스한 감촉이다.
격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격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모든 걸 가진 자에게보다 거의 가진 게 없는 자에게서 더 잘 목격할 수 있는 가치이고, 모든 걸 가진 자가 이미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유일한 가치이고, 거의 가진 게 없는 자가 유일하게 잃기 싫은 마지막 가치이기 때문이다.
나
가장 쉬운 연사으로 헤아려지는 자.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연산으로 헤아려야 할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자. 나를 가장 많이 속이는 장본인. 내가 가장 자주 속는 장본인. 가장 추악하지만 가장 빠르게 용서하는 사람. 빠른 용서로 가장 깊이 추악해지게 방치하게 되는 사람. 가장 만만한 분노의 대상. 가장 최후의 분노의 대상. 실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서 두려운 자. 어쩌면 '너'의 총합일 뿐인 자.
눈
시각이라는 감각에만 의존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시각의 즐거움도 시각의 도움도 외면한 채로 살아간다. 보이는 것만 잘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들에 여전히 무지한 채로.
달
변해가는 모든 모습에서 '예쁘다'라는 말을 들어온 유일무이한 존재.
덜
가장 좋은 상태.
떼
동물들 사이에서는 이 대열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이 낙오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대열에서 떨어져나오는 것이 용기다.
매
아이였을 때는 어른으로부터 가해졌지만, 어른이 되면 양심으로부터 가해져야 하는 것.
모
모난 돌이 정 맞는다지만 모서리를 선명하게 만듦으로써 반짝이는 보석이 태어난다.
법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창안하였으나 권력을 비호하기 위해 사용된다.
벗
동지와는 사소한 이견을 좁혀나가기 위하여 논쟁을 한 이후 옹호로 귀결되어야 옳고, 벗과는 사소한 이견으로 대화를 농밀하게 만든 이후 다름에 매혹되어야 옳다.
뼈
잘 발라 내가 남겨두면 성찬을 만끽한 것이고, 잘 발라 들짐승이 남겨두면 참혹을 목격한 듯하다.
시
1. 이미 아름다웠던 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될 수 없고,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것이 기어이 아름다움이 되게 하는 일.
2. 성긴 말로 건져지지 않는 진실과 말로 하면 바스라져버릴 비밀들을 문장으로 건사하는 일.
3. 언어을 배반하는 언어가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
씨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옆
사람이 있어야 할 가장 좋은 자리. 사회적으로 높거나 낮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인맥상에서 멀거나 가깝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누군가에게.
왜
'왜 학교를 그만두었어요?'라는 질문에는 '왜 학교를 다니나요?'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고, '왜 결혼을 안 했어요?'라는 질문에는 '왜 결혼을 했어요?'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며, '왜 아이를 안 낳았어요?'라는 질문에는 '왜 아이를 낳았어요?'라는 반문이 가장 현명하다.
죄
죄인은 아니지만 우리는 죄악에 가담하는 중이다. 한 사회의 악순환에 대하여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을 함으로써 무감하지 않으며 묵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뿐,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말로써 우리를 죄악과 구별지어 스스로가 안전하다는 자기 위안을 얻는 동시에, 죄악을 더 당당하게 더 안전하게 만드는 데 공조한다.
책
누구나 자신의 문제들을 잔뜩 짊어지고 살아가지만 자신이 짊어진 무게보다는 누구나 조금 더 어리석다. 책을 읽는 순간에는 그 어리석음을 덜어내기 위해서 배우려는 겸손함이 있다. 물론 아름다움을 목격하고자 하는 욕구도 있다. 인간의 사유와 인간의 말이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다운지 책을 통해 목격하는 행위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침
매일 삼키고 살면서도 뱉어지면 더러워 보인다.
티
가난함은 티가 나고 부유함은 티를 낸다.
편
아이들은 함께 놀기 위해 편을 나누고, 어른들은 함께 어울리지 않기 위해 편을 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