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전쟁의 공포

샌. 2010. 12. 26. 06:28

새벽에 장모님에게서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야들아, 큰일 났다. 전쟁이 났다. 빨리 테레비 틀어봐라." 아니, 왠 날벼락이란 말인가. 가슴이 방망이질 치면서 얼른 리모콘으로 손이 갔다. 그러나 TV는 조용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조금 뒤에 사정이 밝혀졌다. 새벽의 병원 구급차 소리를 듣고 전쟁 경보 사이렌으로 착각하신 것이다. 장모님은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 지난 연평도 사건 이후 전쟁이 일어날까 봐 밤잠을못 주무신다. 물론 자식들 걱정 때문이다. 전쟁 안 일어나니까 염려 마시라고 해도 너희들은 안 겪어봐서 모른다고 하신다. 6.25를 경험한 세대 중에 전쟁의 상처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망나니 북한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며 전쟁 불사까지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보수 성향의 언론은 그런 분위기를 부채질하고 있다. 전면전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논조도 보인다. 그러나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대참화는 불가피하다. 지난 1994년 북핵 위기 때 한반도는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다. 당시 미군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개전 일주일 만에 군인 100만 명이 사망하고 민간인 사상자 수가 5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어 상황이 또 다르다. 남북 양측이 막무가내로 정면 대결을 한다면 엄청난 파괴와 희생이 뒤따를 것이다.

과연 무엇을 위해 이런 살육을 벌여야 하는가. 어떤 명분도 생명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외치는 사람도 만약 자기 자식이 전방에 있다면 감히 확전 논리에 동조하기 어려울 것이다. 백 배, 천 배의 보복이 일시적 카타르시스가 될지는 몰라도 그 결과는 참혹할 수밖에 없다. 민족과 인류에 대한 범죄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한반도 상황을 보면 장모님의 걱정처럼 정말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들기도 한다. 집안에서 부부의 사소한 감정 싸움이 죽음까지 부르는 경우가 있듯이 국가간에도 마찬가지다. 현재 남북한에는 전쟁 억제 장치가 너무나 미약하다. 더구나 국가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전쟁을 부추기는 발언들을 내뱉고 있다. 그들의 책무는 전쟁을 막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긴장 관계를 조성해서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잘못 당겨진 방아쇠가 이 땅을 불바다로 만드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호전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한 구급차 소리에 놀라 새벽잠을 설치는 일은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국민이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제발 정치를 잘 해 주길 부탁한다. 외투를 벗기는 건 세찬 바람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임을 잊지 말자. 장모님의 걱정이 영원히 기우로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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