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만년필

샌. 2011. 1. 17. 20:37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하면서 많은 점이 달라졌다. 그중에서도 중학교에서는 연필을 못 쓰게 했다. 잉크를 찍어 펜으로 글씨를 쓰면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펜대는 무척 예뻤다. 디자인도 다양했고 속에는 여러 색깔의 알록달록한 무늬가 들어있어서 투박한 연필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개구쟁이들에게 잉크병이 문제였다. 가방에는 쏟아진 잉크로 지도가 그려졌다. 책상이나 교실도 쏟아진 잉크로 얼룩이 지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잉크병에다 스펀지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만년필을 사용하게 된 건 훨씬 뒤의 일일 것이다. 비록 문방구에서 파는 값싼 만년필이었지만 그 덕분에 잉크병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뚜껑에는 화살표가 그려진, 아마도 파카 만년필을 흉내 낸듯한 만년필이었다. 나중에는 파이롯트 제품을 애용했다.


그러다가 볼펜이 나오면서 만년필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일회용 시대는 볼펜이 나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글씨체가 나빠진다고 미끄러지는 볼펜을 쓰지 못하게 하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채 1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우리는 연필에서 잉크, 만년필, 볼펜을 두루 섭렵한 세대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만년필을 갖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보기 어렵게 되었다.


나이가 들면 복고적이 되는 탓인지 이젠 다시 만년필을 갖고 싶다. 어쩌다 문방구에서 만년필을 보게 될 때 더욱 그렇다. 장난감을 사고 싶은 어린아이의 심정이 그런지 모른다. 한번은 만년필을 사기 위해 일부러 교보문고에 딸린 문구점에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러나 값이 비싸 포기를 하고 말았다. 만년필이 그렇게 비싸야 하는 이유가 납득이 안 된다. 수요가 적다보니 대량생산이 안 되어서 단가가 비싸게 먹히는가 보다.


어느 노작가가 아직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는 기사를 보고 참 멋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런 흉내를 내보고 싶다. 원고지에 글을 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 책상 위에는 만년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를 만년필로 써보고도 싶다. 이건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 그저 나만의 자족(自足)의 기쁨이다. 혹시 아는가, 퇴임 기념으로 누군가가 만년필을 선물할지, 그렇지 않더라도 이번에는 나에게 주는 선물로 만년필을 하나 장만할 예정이다. 어떤 경우든 이 만년필은 나의 애장품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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