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설날과 세배

샌. 2021. 2. 12. 11:22

코로나로 이번 설은 형제들과 따로따로 지내기로 했다. 설날에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 내려가지 않은 것은 처음이다. 아침에 첫째가 찾아와서 셋이 오붓하게 보내는 설날 아침이다. 오가는 고속도로의 정체 걱정도 없고, 다른 신경 쓸 일도 없다. 사람들과 접촉 없이 지내는 조용한 명절이 좋긴 하나 마음 한편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다.

 

어릴 때 설날은 아이들의 잔칫날이었다. 설날 준비로 며칠 전부터 집안은 부산했고, 섣달 그믐날 저녁은 왁자지껄한 명절의 전야제였다. 잠을 안 자려고 버텼지만 한 번도 이긴 적은 없었다. 설날에 일어나면 먼저 차례를 지냈다. 좁은 방에서 열 명 남짓이 차례상 앞에 모이면 바싹 붙어있어야 했다. 절을 하면 아버지 엉덩이가 바로 얼굴에 닿을 정도였다. 그게 우스워 킥킥거리다가 항상 주의를 받았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웃음이 멈췄지만 그 뒤에는 동생들이 이어받아서 한동안 우리 집의 전통이 되었다.

 

차례가 끝나면 할아버지와 부모님께 세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었다. 설날의 하이라이트는 친구들끼리 모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20호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라 모든 집을 찾아다녔다. 세배를 마치면 어느 집이나 꼭 먹을거리를 내왔다. 마치 어른이라도 된 듯 그런 대접을 받는 게 재미있었다. 네댓 집을 돌고 나면 배가 빵빵해지고 나중에는 주머니에 과자를 챙겨서 주머니도 불룩해졌다.

 

J네 집은 맛있는 과자가 많아서 인기가 있었다.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일부러 준비한 것 같았다. J의 할머니는 다정다감한 분이어서 아이들과 얘기하는 걸 좋아했고 하나라도 더 먹이려 했다. 자연히 J의 집에서 제일 오래 머물렀다. 마을 동쪽 끝에는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있었다. 평상시에 아이들이 그 집에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설날에 마당에 들어서면 할머니는 처마에 우두커니 앉아 계셨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음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세배하러 왔다고 하면 아픈 사람한테는 세배하는 게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그러면서 사탕을 하나씩 손바닥에 올려주셨다. 할머니는 그런 식으로 몇 차례 뵈었을 뿐이지만 기억에는 아련하게 남아 있다.

 

설날 오후가 되면 다른 날보다 더욱 신나게 놀았다. 들뜬 명절 분위기에 더해 먹을 것은 넘쳐났다. 어른들은 설날이 지나도 세배하려 다녔다. 외지에서 오는 사람은 며칠 지나서도 찾아왔다. 그럴 때면 부엌에서 상을 차려서 할아버지가 계신 사랑방으로 대령했다. 언제 누가 올지 모르니 어머니는 항상 대기 상태였다. 그 시절 설날은 일주일 정도는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어서 정월 대보름이 다가왔으니 농한기의 정월 한 달은 축제의 시기가 아니였던가 싶다.

 

그때로부터 훌쩍 세월이 흘렀고 이젠 손주가 그 시절 내 나이가 되었다. 철 모르고 뛰어다니던 아이들을 바라보던 그 옛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60년 전 고향 마을 할아버지가 앉았던 그 자리에 내가 앉아 10살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다 보면 내가 할아버지인지 아이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내일은 손주가 찾아올 것이다. 세배를 한다고 하면 둘이 서로 맞절을 해 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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