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손주를 데리고 경주에 갔을 때 경주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다는 걸 발견하고 나 스스로 놀랐다. 손주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을 마주하고도 한 마디 해 주지 못하고 벙어리가 되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경주, 천년의 여운>은 역사문화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임찬웅 선생이 경주에 대해서 쓴 책이다. 경주에 대한 상식 수준의 지식이라고 얻고자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신라의 역사와 경주에 존재하는 고분, 사찰 등 유적지를 설명한다. 다시 경주에 간다면 손주에게 조금은 아는 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망록 겸해서 몇 가지 사실을 간추리면,
- '천년 왕국'이라 불리는 신라는 정확히는 992년(BC 57 ~ AD 935)이다.
- 거서간, 이사금, 마립간의 명칭이 지증마립간 때에 왕으로 바꾸었다. 이때 국호도 사로국에서 신라로 바꾸었다.
- 신라(新羅)는 '德業日新 網羅四方(국가의 덕이 날마다 새롭고, 사방을 덮는다)'는 뜻이다.
- 법흥왕 7년(520)에 율령을 반포하며 국가다운 체제를 갖추었다. 불교 공인.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태종무열왕(김춘추) - 문무왕(삼국통일)
- 경덕왕(742~765) 때가 신라의 황금기로 석굴암, 불국사, 성덕대왕신종, 월정교 등이 만들어졌다.
- 신라 궁궐인 월성(月城)은 아직 발굴 조사중이다.
- 신라 말기의 혼란(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
- 경순왕의 무기력한 항복, 그 덕분에 경주의 약탈과 파괴를 피하다.
- 신라를 망가뜨린 골품제(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 금관은 왕이 실제 쓰던 것이 아니라 장례용품이다.
신라 56명의 왕 중에 제일 특출한 이는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이 아닐까. 문무왕은 통일을 성취한 업적만이 아니라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고 인품도 훌륭했다. 현명한 군주였으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왕의 유언이다.
"나는 병을 얻으니, 운수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古今)이 마찬가지라! 종묘사직의 주인은 한시라도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니 태자는 곧 왕위를 이어라. 영웅과 같은 옛 군주도 마침내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영혼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기는 바가 아니다. 내가 죽은 지 10일 뒤에 인도식으로 화장하고, 상을 치를 때는 검소하게 하라."
온갖 부장품을 묻고 거대한 왕릉을 만드는 대신 문무왕의 시신은 화장해서 재는 동해 바다에 뿌려졌다.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대왕암에 얽힌 전설은 그렇게 생겨났다. 감은사는 신문왕이 아버지인 문무왕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찰이다.
책에는 경주 고분을 발굴한 일화가 다수 나온다. 문화유산들이 도굴, 도난 등 수난을 당한 사례가 많다. 그중에서 1935년 서봉총에서 발굴한 유물 전시회가 끝난 뒤 박물관 직원들이 기생집으로 들고가서 기생에게 금관을 씌우고 허리띠와 목걸이를 장식하게 하고 놀았다고 한다. 문화유산을 어떻게 대했는지 알 수 있는 어리숙한 시대였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비대칭이 되게 서 있는 다보탑과 석가탑은 다보여래부처와 석가여래부처를 표현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온갖 보화로 장식한 다보탑이 땅속에서 솟아올랐다고 <묘법연화경>에 기록되어 있다. 대중들이 보니 탑 속에 석가세존과 다보부처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영산회상의 상징인 것이다.
다보탑의 조형미는 특이하게 아름다워서 최고의 탑으로 꼽을 만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석가탑을 한 수 위로 본다. 석가탑의 별명이 무영탑인데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숨기고 있는지 모른다. 지은이는 두 탑을 화려한 옷과 심플한 옷으로 비교한다. 화려한 옷은 화려함에 단점이 감추어진다. 심플하면서 완벽하기는 어렵다. 심플하면 단점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석가탑은 심플하면서 완벽하다. 석가탑은 신라 통일 직후 석탑 형식을 실험하기 시작한 지 100년 만에 하나의 전형을 완성했다고 한다. 누구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형식적 틀 속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 그것은 진정으로 어렵고 고달픈 예술적 작업이며 석가탑이야말로 그에 어울리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두 탑의 우열을 가릴 필요야 있겠는가. 다보탑과 석가탑을 제작하고 배치한 사람은 화려함과 단순함의 대비를 통해 무언가를 말해주려고 했는지 모른다.
다음에 손주와 경주에 가면 이런 얘기를 해 줄 수 있을까. 역사적 사실만 늘어놓는다면 초등학생인 손주는 흥미를 잃을 것이다. 석가탑만 해도 무영탑에 관계된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연을 적당히 포장해서 들려줘야 할지 모른다. 내 경우도 손주 나이 때에는 정사보다는 야사에 훨씬 더 관심이 컸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을 때 문화유적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경주, 천년의 여운>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신라의 진골은 자신들의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지만, 세상이 그들을 버리고 있었다. 영원한 권세는 없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지 않으면 있는 것마저 잃어버린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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