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유적 입장권은 필요에 따라 1일권(37$), 3일권(62$), 7일권(72$)을 구입하면 된다. 유적 입장료가 캄보디아인은 무료지만 외국인한테는 비싼 편이다. 우리는 3일권을 끊었다. 열흘 동안에 아무 날이나 사흘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첫날은 앙코르 유적의 중심인 앙코르 톰, 따 프롬, 앙코르 와트, 프놈 바켕을 찾기로 했다. 한국어 가이드와 차량은 미리 예약해 두었다. 첫날만 가이드를 이용하고 나머지 날은 우리끼리 가이드북을 들고 찾아다닐 것이다.
앙코르 톰(Angkor Thom)은 12세기에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던 앙코르 제국의 수도였다. 당시에 무려 백 만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해자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 남문으로 향한다. 다리 양쪽에는 54개의 신이 뱀 몸통을 잡고 있는 모습이 세워져 있다. 힌두 신화에 나오는 '우유 바다 휘젓기'를 형상화한 것이다.
남문은 27m의 탑으로 꼭대기에는 사면상(四面像)이 조각되어 있다.
남문을 통과하면 바이욘(Bayon) 사원이 나온다. 앙코르 유적지에서는 진지하게 유적을 살펴보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이 두 일본인 노부부는 쌍안경을 들고 다니며 유적의 미세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관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이욘 사원은 원래 힌두교 사원이었으나 자야바르만 7세가 증축하며 불교 사원으로 바꾸었다. 1층 회랑의 벽에 부조된 조각이 제일 볼 만하다. 3단으로 구성된 조각은 1천 년 전 당시 캄보디아인의 일상을 담고 있다. 다양한 묘사와 정교한 솜씨에 감탄이 절로 일어난다.
코끼리를 타고 전투에 출정하는 장군과 병사들이다. 당시는 앙코르 왕국이 참파(베트남) 왕국과 전쟁 중이었다. 백성과 노예만 아니라 가족들도 함께 전장으로 나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이욘 사원에는 많은 탑이 있고 상층부에는 사면상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37개가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이 사원을 세운 자야바르만 7세가 불교 신자여서 사면상은 관음보살로 보인다. 인자한 미소에서 부처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하지만 자야바르만 7세 자신이라는 설도 있다.
사원 안에는 부처와 함께 힌두교의 상징물인 링가가 공존하고 있다.
바이욘은 앙코르 톰의 중심에 있는 대표 사원이다. 13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중국의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에는 여기를 '금탑 사원'으로 묘사했는데, 당시에는 바이욘의 탑들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었을 것이다.
바푸온(Baphuon) 사원은 바이욘보다 1백 년 정도 먼저 지어졌다. 외형은 피라미드 모양으로 바이욘과 완연히 다르다. 다리를 건너고 십자 회랑을 지나 중앙 성소로 들어간다.
12살 이하는 입장이 되지 않고 경사가 가팔라서 성소에는 올라가지 못하고 1층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바푸온 사원을 뒷면에서 보면 돌을 쌓아올린 모양이 와불(臥佛)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엉성하게 돌이 쌓여 있고 일부는 허물어져 있어 완전한 모습은 아니다. 바푸온 사원은 현재도 계속 복원 작업중이다.
우리는 앙코르 톰 남문을 지나 바이욘과 바푸온을 보고 코끼리 테라스를 지나 동문으로 나왔다. 일반적인 관람 경로의 반 밖에 돌지 못해 아쉬웠다. 왕궁 터와 피미엔나카스, 쁘레아 빨릴라이, 문둥이 테라스는 오늘 일정에서 시간 여유가 없어 생략 되었다. 다음 날 찾아오리라 다짐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앙코르 톰 다음으로 찾은 곳은 따 프롬(Ta Prohm)이었다. 따 프롬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세운 사원이다.
따 프롬의 유명세는 폐허가 된 유적을 거대한 나무 뿌리가 칭칭 감고 있는 데서 나온다. 나무와 돌이 일심동체가 되어 있어서 이젠 어쩌지도 못한다. 그런 광경이 도리어 폐허의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금은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호화롭기 그지없었던 예전의 사원은 무너졌고, 그 자리를 무심한 식물이 점령하고 있다. 이마저도 인간의 손으로 많이 정리한 모습이다. 권력과 영화의 무상함을 이만큼 보여주는 곳이 어디 있을까. 여기에서 사진을 찍자면 줄을 서야 한다.
따 프롬은 나무 외에도 통곡의 방, 보석의 방 등 신기한 구경거리가 있다. 따 프롬은 앙코르 와트 다음으로 인기 있는 유적이라는데 나도 동감한다.
앙코르 톰과 따 프롬 관람을 마치고 앙코르 와트로 가는 길에 점심을 했다.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유적지나 식당에는 물건을 파는 캄보디아 아이들이 몰려들어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내 손주 또래의 아이들이 "원 달러"을 애걸하는데 외면하려니 속이 쓰렸다. 가이드는 못 본 척 하라고 했다. 돈을 주는 게 그들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이 가난을 어찌해야 할꼬?
여느 빈국과 마찬가지로 캄보디아도 빈부 격차가 심각하다. 근본 원인은 부패한 정치에 있지 않나 싶다. 크레르 루즈의 대학살 이후 정권을 잡은 훈센은 40년 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했고, 지난 해에는 아들에게 총리를 물려주었다. 국민들이 불만을 가질 법한데 민주화 운동이나 반정부 시위가 없는 걸 보니 자세한 내부 사정을 알 수는 없다. 캄보디아인에게 물어보았지만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아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는 없었다. 훈센 정권은 내내 친북 성향이었다가 근래에 우리와 가까워졌고, 그 결과 캄보디아 내에 있던 북한 식당도 전부 문을 닫았다고 한다.
앙코르 유적의 대표 주자는 뭐니뭐니해도 앙코르 와트 사원이다. 우선 사원의 규모가 비교 불가일 뿐 아니라 보존도 깔끔하게 잘 되어 있다. 세계의 불가사의를 말할 때 앙코르 와트는 꼭 포함된다.
앙코르 와트는 12세기에 통치한 수리야바르만 2세 때 축성되었다.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고 신성을 나타내기 위해 비슈누 신에게 바친 힌두 사원으로 자신의 왕릉을 겸하고 있다. 대략 4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한다. 앙코르 와트는 가로 1.3km, 세로 1.5km의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를 지나는 다리 길이만 250m다.
다리를 지나면 서쪽 출입구를 만나는데 아름다운 압사라 상이 많이 보인다.
중앙 출입구 오른쪽에 팔이 여덟 개 달린 비슈누 상이 있다. 불교 국가가 된 지금은 부처님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한다.
출입구를 지나면 350m의 참배로를 따라 중앙 성소로 나아간다. 참배로 중간 양쪽에 도서관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있다.
이곳 연못 주변이 앙코르 와트 일출을 보는 곳이다. 연못에 비친 반영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사원은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곳에는 회랑으로 둘러싸인 4개의 목욕탕이 있다. 3층 성소에 들어가기 전 몸을 정결하게 씻던 곳이다.
앙코르 와트에서 가장 성스러운 공간인 중앙탑이다.
3층에서 내려다 본 앙코르 와트 서편 정문 풍경이다.
앙코르 와트의 중심인 중앙탑. 힌두 신화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일곱 개의 산맥이 있고, 그 중심에 메루산이 있다고 한다. 중앙탑은 메루산을 형상화 한 것이다.
3층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앙코르 와트가 힌두 사원으로 건축되었으므로 원래는 비슈누 상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캄보디아 현지인이 부처님 앞에서 참배를 하고 있었다.
3층까지 둘러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회랑의 부조를 구경했다. 복잡한 힌두교 설화를 조각한 것이라 가이드가 설명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부조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할 뿐이었다.
긴 회랑 벽을 따라 엄청난 양의 이야기를 담은 부조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천국과 지옥' '우유 바다 휘젓기' 부조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서쪽 정문으로 들어갔다가 반대편인 동쪽으로 나왔다. 해가 낮아지며 지고 있었다. 앙코르 와트는 일출을 보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들릴 것이다.
석양을 보기 위해 가까이 있는 프놈 바켕(Phnom Bakheng)으로 갔다. 프놈 바켕은 9세기에 건축되었으니 앙코르 유적 중에서는 가장 먼저 만들어진 셈이다. 아소바르만 1세가 수도를 롤루오스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세웠다. 이 사원은 산 위에 있어 석양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석양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승용차를 타고 다녔으니 편하게 보낸 셈이다. 더운 날씨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이었지만 피곤한 줄은 몰랐다. 앙코르 유적의 놀라운 풍경에 넋을 앗긴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제대로 음미하려면 오늘 들린 네 유적을 보는 데 하루로는 어림도 없다. 앙코르 와트나 앙코르 톰은 각각 하루씩은 잡아야 마땅해 보인다. 오늘은 미래에 다시 찾을 때를 위한 예비 답사 쯤으로 생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