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어른의 어휘력

샌. 2024. 4. 7. 12:05

"언어는 나다. 나의 세상은 언어의 한계만큼 작거나 크다."

 

책을 읽다가 순간 멎어버린 강렬한 인상의 문장이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인식한다면 어휘력이야말로 우리가 보는 세상의 넓이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속 생각을 드러낼 어휘가 부족하다면 세상과의 소통에 그만큼 장애를 겪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휘력을 키운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힘과 시각을 기르는 일이다. 지은이인 유선경 작가는 <어른의 어휘력>에서 책 읽기, 글쓰기, 말하기, 공감, 소통과 관련한 어휘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랫동안 라디오 방송 작가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작가는 아름다운 우리말도 소개한다. 주석에는 보석 같은 예쁜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메모해 두었다가 언젠가는 써먹어 보고 싶은 말들이다.

"나는 한갓진 게 좋고, 잠포록한 날씨를 좋아하고, 어둑발 내려앉는 시간을 좋아한다."

이 문장에 나오는 '한갓지다(한가하고 조용하다)' '잠포록하다(날이 흐리고 바람기가 없다)' '어둑발(사물을 뚜렷이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빛살)' 같은 단어는 정말 예쁘다. 어휘력이 확장되어 정밀하게 세상을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다면 그만큼 세상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게 분명하다.

 

서로 닮은 것을 말할 때 '비슷하다'라는 표현을 상용하지만 '가깝다' '근사하다' '대등하다' '비스름하다' '유사하다' '비등하다' '그만그만하다' 등도 있다. '다르다'도 유사어로 '남다르다' '별나다' '특별하다' '판이하다' '멀다'가 있다. 이런 말들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한다면 얼마나 문장이 맛깔날 것인가. <어른의 어휘력>에는 어휘의 교재로 써도 충분한 예문들이 많이 나온다.

 

당연히 이 책은 책 읽기와 글쓰기를 강조한다. 이 둘을 떠나서 어휘력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른이라고 울 일 없으랴. 목 놓아 펑펑 울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 저마다 가슴 열어젖히면 눈물이 그득히 쏟아져 온 땅이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그뿐, 눈물은 나를 변화시키지도 상황을 바꾸지도 못한다. 말 안 하면 왜 우는지 남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울지 마라, 소리 내 말하라, 글을 쓰라. 그래야 내가 변할 수 있고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내 속을 풀어내는 것도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인간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설령 말 때문에 사달날 위험이 크다 해도 결국 말일 수밖에 없다."

"언어는 강철보다 견고한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두드려 금 가게 하고, 틈이 생기게 하고, 마침내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뒷부분에서 지은이는 책 읽기를 할 때 텍스트가 아니라 콘텍스트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텍스트에만 집중하면 오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성경을 비롯한 경전 등이 그러하다. 지은이는 본인이 책을 읽는 콘텍스트를 이렇게 보여준다.

"왜 이 시점에 이 책이 세상에 나왔는가. 대상과 사물을 어떤 관점으로 보고 있는가.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가. 세련된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한 구절은 무엇인가.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연관돼 있는가. 작가 스스로 체득한 고유의 스타일이 있는가. 최종적으로, 무엇을 꿈꾸게 하는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책을 덮고 그 구절에 풍덩 빠져 한껏 음미한다. 한 권을 정독한 후에는 안표난 적바림한 구절을 중심으로 다시 읽는다. 처음 읽을 때와 달리 읽힌다. 다시 읽어도 좋은 구절을 필사한다.

콘텍스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 너머가 궁금할 때가 있다. 읽은 책을 징검다리 삼아 저자의 다른 책, 저자가 영향 받은 책, 같은 주제를 담은 다른 저자의 책,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나 문화 관련 책 등으로 건너간다. 심리학으로 시작했는데 뇌과학을 거쳐 미래과학 기술에 와 있기도 하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없다. 내 자아에 있었으나 지금까지 볼 줄 몰라서 보지 못한 진실을 책 읽기를 통해 이제야 발견했고 나는 그 기쁨에 흥분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쌓여 한 사람의 콘텍스트가 되고 인생의 주요한 문제뿐 아니라 대상과 사물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근거와 기준이 된다. 그것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선택하고 결정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테리어 잡지를 많이 본다고 좋은 가구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나의 생활습관을 잘 알아야 나에게 딱 맞는 가구를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른의 어휘력>을 읽으며 말, 책 읽기, 글쓰기 등에 관한 '어떤 밝은' 느낌이 좋았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내 어휘력의 한계일 것이다. 사족으로 책에서 착오를 하나 발견했다. 49쪽에서 "지구 한 바퀴는 고작 40만 킬로미터다"라고 했는데 실제 지구 한 바퀴는 4만 킬로미터다. 문과 출신이 과학적 사실이나 수치에는 무관심한 편이다. 이 정도면 애교로 봐줄 만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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