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왕 인조는 한강 삼전도로 나가 청 태종을 향해 무릎을 꿇고 항복한다.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지한 달여 만의 일이었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어 보면 싸움다운 싸움 한 번 못해 본 조선 군대의 지리멸렬한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하긴 청군이 개성까지 쳐들어 올 때까지도 전쟁이 일어난 것도 몰랐다니까 당시 나라꼴이 어떠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병자호란의 치욕은 조선 집권층의 시대착오적 중화사상 탓이라는 게 정설이다.만주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면서도 사대부들은 고집불통으로 명나라와의 의리만 주장하고 다른 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라고 멸시했다. 청으로 국호를 바꾼 만주족은 다시 조선을 침략해서 항복을 받고 두 나라는 군신의 관계를 맺게 된다. 전쟁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 갔다. 그 과정에서 죄 없는 인민의 고통이 오죽 했겠는가. 왕이나 권신들이 책임 추궁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기록되지 않은 이름 없는 인민들의 죽음과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떤 사람은 생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개의 큰 전쟁을 겪기도 했을 것이다.
오늘, 송파구 삼전동에 있는 '삼전도비(三田渡碑)'를 보러 갔다. 원 이름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인조 17년(1639)에 세워졌는데, 내용은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으로 찬미하는 것이다. 이 비는 원래지금의 석촌호수 주변에 있었다는데 땅에 묻히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한다.비가 있는 곳은 주택가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로 주변에서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치욕의 비석이라 그런지 조경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한 눈에 보였다. 큰길에서도 비를 찾아가는 안내문 하나 볼 수가 없었다. 부끄러운 것도 역사일진대 좀더 단장을 해서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석촌호수를 지나면서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지금은 고층 아파트로 변한 저곳에 산 적이 있었다. 휴일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이 호수로 나들이를 나오곤 했었다. 어느덧 20여 년 전 얘기가 되었다.
암사동에서 한강으로 나와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광진교를 건넜다.광진교는 개통시에는 4차로의 차도였으나 작년에 두개 차로를 줄이고 넓은 보행로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다리 위에 나무를 심는 등 녹지도 만들었다. 파격적인 개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차 중심보다는 사람 중심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반가웠다. 좋은 시설 덕분에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다른 다리에서는 걷는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사족이지만 다리 이름에 '대'자가 붙지 않아서 광진교가 더 친근하게 다가온다. 한강대교, 영동대교, 올림픽대교 등등, 무슨 '대'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젠 대물(大物) 숭배를 그만 둘 때도 되었다. 그런 의식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리 규모야 여느 한강 다리와 마찬가지지만 이 다리는 그냥 광진교로 이름 붙었다.
광진교를 건넌 뒤에는잠실 방향으로 계속 걸었다. 3년 전까지 구의동에 살았기 때문에 이곳 길은 운동 삼아 자주 나와 걷던 길이었다. 이 길의 특징은 강변을 따라나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강변에서도 나무들이 잘 자란다는 것을알 수 있다. 나무가 있는 풍경은 훨씬 운치가 있고 안정감을 준다. 다른 곳에도 산책로를 따라 나무를 많이 심었으면 좋겠다는기대를 가지고 있는데 최근의 한강 르네상스 공사에서도 나무를 심는 것은 볼 수 없어 그런 것이 나에게는 항상 아쉽게 느껴진다.
테크노마트에 들러 카드리더기를 산 뒤에 전철로 집에 돌아왔다. 원래는 뚝섬 유원지까지 걸을 계획이었지만 저녁이 가까워져서 일찍 접었다. 동행했던 아내도 신발이 맞지 않아 많이 힘들어했다. 날씨는 좋았는데 오늘은 약 7 km 정도밖에 걷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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