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63

진화하는 AI

알파고가 더욱 업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작년에 이세돌 프로를 눌러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강화 학습을 통해 실력이 몇 단계 더 향상된 2.0 버전이 되었다. 중국에서 세계 1위인 커제와 대결 중인데 기보를 보니 인간은 이제 상대가 안 된다. 작년까지는 알파고가 프로들 기보를 보면서 공부했는데, 이제는 자기 스스로 학습한다고 한다. 바둑에 관한 한 거의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아무리 컴퓨터가 발전해도 창의성에서는 인간을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고 전에는 생각했다. 바둑에서도 그랬다. 바둑에서 경우의 수는 우주에 있는 원자 숫자보다 많다면서 컴퓨터는 도저히 그 모두를 계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선입견이 작년에 알파고가 등장하면서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때도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더 ..

길위의단상 2017.05.25

보고 싶은 것만 본다

19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이다. 이번 선거는 좀 싱겁다. 한 후보가 워낙 독주를 하고 있어서 이미 몇 달 전에 결정이 났다. 타 후보들이 큰소리를 치긴 하지만 허장성세로 들린다. 막판에 걱정스러웠던 반대 진영의 단일화 변수도 없었다. 이제 몇 시간 뒤에 내 판단을 확인하는 절차만 남았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친구들은 대부분 강도만 다를 뿐 보수적 경향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고향 학교 동문 단톡방은 유별나다. 거의 문자 폭력 수준으로 극우적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온건한 보수는 말없이 조용히 있다. 일부 극렬한 인간들이 단톡방을 점령하고 제 정치적 견해를 강요한다. 자제시키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같은 하늘 아래 사는데 이렇게 세상을 보는 게 다르구나, 참 신기할 뿐이다. 사람은 제 보고..

길위의단상 2017.05.09

아프면 서러워

우리 동네에도 종합병원이 생겼다. 손주가 옆에 있으니 병원에 자주 들락거린다. 어린아이는 병치레가 잦다. 대부분이 감기 증세다. 옛날 같으면 참고 견딜 만한 것도 요즘은 무조건 병원에 간다. 그 결과 약을 달고 산다. 기침이 심하다고 최근에는 두 번이나 폐 사진을 찍었다. 조기 치료도 좋지만 어릴 때부터 과잉 진료가 아닌지 안타깝다. 그러나 옆에서 콜록대는 자식을 보며 버티기만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속말을 참고 기사 노릇을 할 뿐이다. 진료실 밖에서 대기하다 보면 이런저런 환자를 본다. 남의 일 같지 않다. 병원에 갈 때마다, 아프면 안 되는데, 라는 독백이 절로 난다.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게 없다. 지지난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제일 두려웠던 건 무력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길위의단상 2017.05.01

부러워라

12박 13일 동안 패키지로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있다. 너무나 원기왕성한 친구다. 이 친구는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집에 짐을 풀자마자 차로 한 시간 거리인 텃밭으로 달려가 땅을 고르고 채소를 심었다. 다음날은 시제를 지내러 KTX를 타고 목포로 내려갔다. 올라와서는 꽃 보러 산에 같이 가자고 한다. 먼 나라 여행을 다녀왔으면 피곤해서 며칠 쉬어야 정상이 아닌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다. 천생이 약골인 나는 이런 체력을 보면 너무 부럽다. 해외에 나갔다 오면 두 주일 정도는 헤매는 게 보통이다. 시차 부조화로 잠자는 시간이 흐트러지니 밤낮없이 약 먹은 병아리처럼 비실거린다. 도시 외출할 기운이 생기지 않는다. 이번에 뉴질랜드에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회복되는 듯하여 바깥 걸음을 했다..

길위의단상 2017.04.12

손주 때문에 웃는다

동해에 살던 외손주가 가까이 왔다. 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만날까말까 했는데 이제는 거의 매일 본다. 다행히 어미가 육아를 맡고 있어 손주를 봐줘야 하는 부담은 없다. 딸은 다시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데 솔직한 내심은 지금대로 제가 키웠으면 좋겠다. 맞벌이 부부가 되면 아무래도 손주에 온전히 매일 수밖에 없다. 세 살이 된 손주는 이제 제 의사 표시가 분명하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니 같이 노는 것도 재미있다.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때다. 사실 아내와 둘이 있으면 웃을 일이 거의 없다. 둘째는 남자아이인데도 첫째보다 애교가 많다. 손주 때문에 웃음 근육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인다. 남자라서 호기심을 가지는 대상도 첫째와는 다르다. 관심 우선순위가 자동차, 로봇..

길위의단상 2017.03.29

뉴질랜드 여행 계획

아홉 명의 일행이 며칠 뒤면 뉴질랜드 여행을 떠난다. 26일간의 대장정이다. 밀포드 트레킹을 중심으로 살이 붙다 보니 거의 한 달 가까운 여정이 되었다. 밀포드 외에도 여덟 차례의 트레킹이 있다. 조금은 착잡한 심정으로 뉴질랜드로 떠난다. 그동안 사람 관계가 많이 서걱거렸다. 여행의 반은 짐 싸는 설렘인데 이번에는 담담하다. 어쨌든 인천공항을 이륙하게 되면 무척 홀가분할 것 같다. 많이 걸으며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해야겠다. 돌아오면 봄이 될 것이다. 1일 인천공항 출발 2일 Christchurch 도착. Geraldine으로 이동(204km, 2.5h) 3일 Tekapo(마운트존 천문대, 푸카키호수) 후크벨리 트레킹(10km, 4h) 4일 뮬러헛 트레킹(12km, 8h) 5일 Twizel, C..

길위의단상 2017.02.01

30,000,000

전국을 휩쓴 조류인플루엔자(AI)로 한 달 사이에 닭과 오리가 3천만 마리 넘게 살처분 되었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3천만이라는 숫자에 현기증이 난다. TV 화면으로 보는 살처분 현장은 세기말적 풍경이다. 아우슈비츠가 연상되는 건 과민 반응인지 모르겠다. 언젠가는 인간도 무더기로 살처분될 수도 있다는 예감이 두렵다. 거의 매년 AI 소동을 겪으며 이런 난리를 치고 있다. 공장식 축산 산업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양계장을 보면 도저히 닭을 먹을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야만적이다. 저도 생명일진대 어떻게 저런 대우를 할 수 있을까 싶다. 수익을 내자면 어쩔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하는 시스템에서 축산업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의 비극이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이 이런 ..

길위의단상 2017.01.05

금성인의 지극함

첫째 손주는 여자지만, 둘째 손주는 남자다. 커가는 모습을 보면 둘의 차이가 엄청나다. 아예 다른 종족이 아닌가 싶다. 여자와 남자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져 나오는 게 맞는 것 같다. 뇌 구조 자체가 다르다. 둘째는 걸음마를 할 때부터 길가의 돌멩이와 막대기에 관심을 보였다.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잡고 던지고 하는 게 일이었다. 지금은 나뭇가지만 잡으면 칼싸움을 하려고 덤벼든다. 돌멩이도 원시 시대의 무기였다. 수컷의 피에 흐르는 사냥과 전투 유전자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사내아이가 왜 돌멩이와 막대기에 본능적인 호기심을 가지는지 이제야 알겠다. 반면에 첫째는 이런 데는 아예 흥미가 없다. 성인이 된 여자와 남자가 부부가 되어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게 얼마나 어..

길위의단상 2016.12.23

2016. 12. 9.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당했다. 여섯 차례에 걸쳐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매운 시민의 외침이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남아있지만, 대통령 퇴진이라는 시민의 요구를 결코 무시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2016년 12월 9일, 이날은 역사에 시민 혁명으로 기록될 것이다. 최순실에 의한 국정 농단에 분개했지만, 촛불을 통해 시민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보여주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헌법 1조의 생생한 교육장이었다. 어떤 어둠의 세력도 빛을 이길 수는 없다. 수백만 명이 모였지만 집회가 평화롭게 진행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일부 정치권에서는 폭력 사태와 계엄령 선포라는 대혼란을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은 분노를 표현하되 마치..

길위의단상 2016.12.12

차창 밖 풍경

나는 차창을 스쳐가는 풍경이 좋다. 서울을 오갈 때 버스를 이용하는데 늘 창가에 앉아 바깥 경치에 넋을 놓는다. 항상 보는 것이지만 다닐 때마다 새롭다. 그러나 사람들은 밖에 별 관심이 없다. 자리에 앉으면 아예 커튼을 닫아 버리기도 한다. 젊은이는 스마트폰에 빠져든다. 패키지여행을 가면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다. 차 안에서는 대개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잔다. 그런데 나는 바깥 경치에 탐닉한다. 버스에 타면 눈이 더 말똥말똥해진다.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참 특별하구나, 생각한다. 캄캄한 밤에도 마찬가지다. 드문드문 있는 불빛만이라도 괜찮다. 풍경이 단순해지면 이런저런 상념에 더 잘 빠진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에는 뭔가 신비한 요소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시간의 흐름이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정지한 장..

길위의단상 2016.11.20

2016년 가을

충격적인 일이 닥치면 처음에는 당황하다가 분노하게 되고, 그 뒤에는 우울증이 찾아온다. 암 판정을 받았을 때도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사회적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몇 주째 허탈과 우울증에 빠져 있다. 처음 사건이 불거졌을 때는 설마 그랬을까, 라고 생각했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의혹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분노하게 되고, 그 뒤로 우울증이 찾아왔다. 지금은 화를 내기도 지쳤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기력이 온몸을 감싸고 있다. 십 년 넘게 블로그를 하면서 거의 매일 글을 올렸다. 집에 있으면서 컴퓨터를 열지 않은 적은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텅 빈 듯해 도무지 글을 쓸 수 없다. 바깥나들이도 귀찮다. 세..

길위의단상 2016.11.14

내가 왜 이러지

며칠 전 기원에서 바둑을 둘 때 어리둥절한 장면과 맞닥뜨렸다.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한 노인이 세면대에 소변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 황당해서 고추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확인을 했다. 그 노인은 옆에서 바둑을 두던 노신사라고 불러도 될 멀쩡한 사람이었다. 모르고 그러는 건지, 일부러 그러는 건지, 상황이 전혀 분간되지 않았다. 그래도 못 본 척할 수 없어서, 여긴 세면댄데요, 라고 조심스럽게 한마디 했다. 그러자 노인은, "어, 내가 왜 이러지?"라며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부리나케 바지를 추스르고 세면대를 씻기 시작했다. 그리고 "늙으면 어쩔 수 없어"라는 말만 반복했다. 당사자는 얼마나 민망할까를 생각하니 차차 그 노인에게 연민이 생겨났다. 누구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

길위의단상 2016.10.21

10월 태풍 차바

18호 태풍 '차바(CHABA)'가 우리나라를 지나갔다. 10월에 찾아온 태풍으로는 가장 강력했다. 제주도와 남해안을 따라 지나가며 사망 실종 10명에 많은 재산 피해를 입혔다. 폭우와 강풍이 대단해서 제주도에서는 순간풍속이 47m/s를 기록했다. 역대급 태풍으로 이름이 남을 것 같다. 10월 태풍으로는 이례적이다. 강력했지만 소형이고 이동 속도가 빠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경인 지방에서는 태풍의 영향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잠깐 가는 비가 내리기만 했다. 남부 지방의 피해가 컸다. 차바는 9월 28일에 발생해서 10월 6일에 삿포로에서 소멸했다. 태풍 경로도 10. 4. 12:45 10. 4. 18:45 10. 5. 00:45 10. 5. 06:45 10. 5. 12: 45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은 ..

길위의단상 2016.10.06

2016 그리니치 천체사진

매년 그리니치 천문대에서는 천체사진을 공모하여 시상한다. 얼마 전에 올해의 수상작이 발표되었다. 대상은 개기일식을 연속 촬영한 '베일리의 목걸이(Baily's Beads)'가 차지했다. 아이디어가 참신한 작품이다. 언제 보아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하는 우주의 풍경을 소개한다. (1) 태양 부문 1등, Baily's Beads * Yu Jun(China) * Canon 5D Mark2 + Sigma DG OS HSM 150-600mm f/5-f/6.3 lens, 600mm f/10 at ISO 100 with multifle 1/1600 second * '베일리의 목걸이(Baily's Beads)'란 개기일식이 일어나서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기 직전에 좁은 초승달 모양의 태양빛이 달 가장자리의 불규칙한 ..

길위의단상 2016.10.05

다 얼맙니까?

추석 장을 보러 어머니를 모시고 시장에 갔다. 주차장을 찾느라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안 그래도 좁은 골목이 대목을 맞아 엄청 복잡했다. 조심해서 빠져나가는데 "저런 우째노!"라는 큰 소리가 들리고 시선이 내 차에 집중되었다. 놀라 내려가 보니 바닥에 진열된 채소 위를 차 바퀴가 지나가고 있었다. 할머니 앞에 놓인 가지와 고추가 짓뭉개졌다. "다 얼맙니까?" 그때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미안해하는 건 오히려 할머니였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죄송함을 표시하는 게 우선일 터였다. 그런데 할머니의 안타까움이나 망가진 채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돈으로 해결하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내 실수로 손해를 끼쳤으니 보상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돈보다 중..

길위의단상 2016.09.21

시간강박증

많은 사람이 날 느긋할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나는 무척 화를 잘 내고 조급하다. 나이 들면서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도 가끔 불뚝 성질이 튀어나온다. 그중에 가장 큰 단점은 기다리질 못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음식점엘 갔다가 한바탕 소란을 피웠다.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온다고 악을 썼더니 홀 안의 손님이 다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는 금방 후회한다. 아내는 부끄럽다고 질색이다. 조금만 더 참을 걸,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이다. 느긋이 기다려주지를 못하니 그런 사람과는 꼭 마찰이 생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잃었다. 아마 상대편에서는 뭐 저런 소갈머리가 있나, 하고 욕을 했을 것이다. 남에게 시간 지키기를 요구하..

길위의단상 2016.09.07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움

리우올림픽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전에 비해서 올림픽 열기가 덜한 것 같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도 성숙해 가고 있다는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젠 메달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올림픽이 오염되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무대는 즐거움과 감동을 준다.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최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할지라도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경기가 끝난 뒤 우리나라 어느 선수가 한 말이 기억난다.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잖아요. 그래서 저도 함께 즐기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은 아름답다. 너무 금메달에 집착하면 추해 보인다. 차라리 아름다운 패배가 더 멋지다. 이번 리우올림픽 성화 ..

길위의단상 2016.08.20

공부하면 는다

지지옥션배 바둑대회는 남자 기사와 여자 기사의 단체 대항전이다. 각 12명씩 연승 방식으로 대전한다. 남자와 여자의 기력 차이가 있으니 남자는 40세가 넘어야 참가할 수 있다. 지금 10회 지지옥션배가 진행되고 있는데 1장으로 나온 서봉수 9단이 9연승을 했다. 어제 오유진 2단에게 져서 10연승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9연승도 대단한 기록이다. 바둑에도 전성기가 있다. 타이틀 홀더는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다. 30대가 되면 힘을 못 쓴다. 머리로 하는 싸움인데도 바둑 역시 나이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 이유 중 하나가 현대 바둑의 짧은 제한시간에 있다. 대전 방식의 문제가 크다. 나이가 들면 집중력이나 순발력이 떨어진다. 특히 초읽기에 들어가면 두뇌 회전이 젊은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다..

길위의단상 2016.08.10

까불지 마

허리가 삐끗해서 열흘째 바깥나들이를 못 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겪는 연례행사다. 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로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불시에 찾아온다. 이젠 내 나름대로 통증에 대처하는 방법도 가지고 있다. 이놈이 오면 모든 게 올스톱이다. 다리 근육이 땅기고 허리에 힘을 못 쓰니 정상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심하면 세수하기도 어렵고 똥 눌 때 힘을 주지도 못한다. 그래도 디스크로 고생했을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며칠간 결근을 했지만 백수인 지금은 걱정할 게 없다. 그저 누워 있으면 된다. 전에는 병원도 다니고 침도 맞고 했지만 별 효과가 없다는 걸 터득했다. 낫는 데 걸리는 기간은 대동소이하다. 좀 짜증 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떠나간다. 정상으로 돌..

길위의단상 2016.07.24

민중은 개돼지

교육부의 한 고위직 공무원이 '민중은 개돼지'라는 발언을 했다가 공분을 샀고, 결국은 파면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실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두고 볼 일이다. "민중은 개돼지로 먹고살게만 해 주면 된다." "신분제는 공고화되어야 한다." 기자와의 모임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인 말이었다. 내가 이번 사건을 두려워하는 건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이런 정서가 보편적이지 않을까, 라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양극화되는 문제의 근본에는 엘리트주의가 깔려 있다. 1%의 엘리트가 99%의 민중을 먹여 살린다는 개념이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다. 동시에 99%의 민중은 어리석다는 것이 기본 인식이다. 이미 계급사회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번 '개돼지' 발언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

길위의단상 2016.07.17

꿈에서 아버지를 뵙다

새벽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났다. 한적한 다리 위였다. 갑자기 한 사람이 옆에 다가왔다. 얼굴을 보니 아버지였다. "아버지지예? 아버지가 맞지예?" 아버지는 옅은 미소를 띠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아버지 품에 안겨 울었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살아계실 때 다정하게 말 한마디 해 드리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따뜻하게 나를 껴안아 줄 뿐이었다. 나는 반가워서 계속 흐느꼈다. 아버지는 흰색의 깔끔한 여름옷을 입고 계셨다. 얼굴은 살이 찌시고, 표정은 없었지만 밝았다. 오래전 꿈에서는 항상 병약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마음이 아팠었다. 고맙고 안심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잠이 깼다. 무척 생생한 꿈이었다.

길위의단상 2016.07.02

탁구 치는 재미

탁구는 대학생 때 치기 시작했다. 여가에는 탁구를 치는 게 취미였다. 그때 대학생들 주류는 카드를 하거나 당구를 즐겼다. 나는 거기에 끼지 않았다. 왠지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골프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서적 거부감이 있다. 그런 면에서 탁구는 무난한 운동이었다. 한 친구와 열심히 쳤다. 그때는 탁구장이 흔했다. 서울 시내에서 가장 싼 데가 장충체육관 지하에 있는 탁구장이었다. 공영이라 그랬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자주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자리가 없어서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내 탁구는 정식으로 배운 게 아니라 그냥 마구잡이로 치면서 늘게 된 경우다. 그때는 레슨이란 게 없었다. 있었다 해도 돈 내고 배울 형편도 안 되었다. 그래도 젊었을..

길위의단상 2016.06.24

문제는 유전자야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땀으로 이루어진다." 에디슨이 한 말이다. 종종 이 말은 위대한 업적이 1%의 천재성과 99%의 노력에 의한다고 오해되고 있다. 특히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이 노력을 강조하는 뜻으로 자주 인용했다. 어렸을 때는 긴가민가하면서도 그대로 믿기도 했다.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인간의 차이는 크지 않다. 누가 땀을 더 흘리느냐로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 나는 왜 안 되지, 하면서 더욱 채찍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살고 보니 순전히 거짓말이란 걸 알겠다. 에디슨의 말도 아마 영감을 강조하는 취지였을 것이다.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땀도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문제는 영감이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다. 타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유전자를..

길위의단상 2016.06.07

나를 위한 글쓰기

고등학교 1학년 때 소설이랍시고 끄적거린 적이 있다. 글을 쓴 계기는 사랑의 열병 때문이었다. 서울로 유학 온 열여섯 살 시골 촌놈이 사춘기를 맞았는데 묘하게 같은 반 남학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멋있게 생긴 미소년이었다.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니셜로는 JY다. J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은 동성애의 시기를 지나 이성에게로 향한다고 한다. 나에게는 동성에 대한 밀도가 너무 짙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J의 관심을 끌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 있으면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다. 멀리서 지켜보며 애만 태웠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니 더더욱 드러내지 못할 일이었다. J 역시 추호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짝사랑이 1년 내내 계속되었다. ..

길위의단상 2016.05.20

졸혼

일본에서는 노년층에서 '졸혼(卒婚)'이 유행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혼인 관계를 졸업한다'는 뜻이다. 졸혼은 이혼이나 별거와는 다르다. 사이가 나빠서 갈라서는 게 아니라, 부부로서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따로따로 각자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가족이라는 구속에서 벗어나 상대의 자유를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비슷한 것으로 '해혼(解婚)'이 있다. 역시 '혼인 관계의 해제'라는 뜻이다. 인도 힌두교에서는 남자가 가장의 임무를 마친 뒤 구도의 삶을 원하면 해혼식을 하고 숲으로 들어간다. 간디는 삼십 대 후반에 아내와 해혼을 합의하고 인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인도에는 전통적으로 해혼 문화가 존재한다. 졸혼은 장수 사회의 한 단면도다. 대개 60대 중반이 되면 자식을 짝지어 보내고 부부만 남는다. 옛날 같..

길위의단상 2016.05.15

말 없는 아이

지인 중에 닉네임이 '머거주기'인 분이 있다. 처음에는 먹성이 좋다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설명을 들어보니 어렸을 때 말을 받아먹기만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말 없는 아이였다는 뜻이다. 말 없기로 치면 나도 그분 못지않았다. 어머니가 혀를 차며 자주 들려주는 일화가 있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여섯 살 때쯤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5일마다 열리는 장에 따라가는 게 제일 즐거운 날이었다. 신나는 볼거리도 많았을뿐더러, 군것질거리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사탕 몇 알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었다. 집에서 장터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날 나는 할머니를 따라 장에 갔다. 할머니는 곡식을 팔고는 호미를 비롯해 몇 가지 물건을 샀을 것이다.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길위의단상 2016.05.03

한 장의 사진(22)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월로 수학여행을 갔다. 1964년도였다. 기차를 타고 제천까지 가서 다른 열차로 바꿔타고는 영월에서 내렸다. 산골 촌놈들이라 기차를 처음 타 보는 아이들도 많았다. 기차 안에서는 의자 쿠션이 신기해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좋아라 했다. 첫날은 화력발전소를 견학하고 허름한 여관에 묵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여인숙 수준도 안 되는 집이었다. 저녁을 먹고는 오락 시간에 단체 춤판이 벌어졌다. 방 안에서 얼마나 뛰었는지 천정에서 떨어진 흙이 눈에 들어가 빼내느라 고생했다. 몇 명이 따라 나와서 도와주었다. 안에서는 유행가가 이어지는데 뒤뜰에서 쳐다본 밤하늘의 별들이 무척 아름다워 눈 아픈 핑계 대며 들어가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둘째 날에는 장릉과 단종 유적지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 사진은 ..

길위의단상 2016.04.22

남 일 아니야

작년부터 병원 출입이 잦다. 올해는 방문 목록에 신경과가 추가되었다. 병원에 가 보면 아픈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안다. 하나같이 남의 일로 보이지 않는다. 건강할 때는 나와는 관계없는 일로 여겼다. 늙고 병든다는 건 먼 얘기였다. 그러나 언제인가부터 달라지고 있다. 어린아이를 보면 손주 같고, 노인을 보면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휠체어에 탄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를 환갑은 족히 지났을 아들이 밀고 간다. 어머니 건강이 여의치 못하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으리라. 내 모습이 투영되니 심란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다. 내 몸뚱이 사정도 당장 내일 일을 모른다. 검사 결과에 따라 환자복을 입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늙고 병들고 죽는 인생사가 깃털만큼 가볍다. 그래선지 TV를 보다가도 슬..

길위의단상 2016.04.03

4:1

전혀 예상 못했다. 과연 컴퓨터가 얼마나 인간 수준에 육박했을까, 궁금한 정도였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4:1로 이긴 것이다. 체스는 몰라도 바둑은 안 된다고 누구나 말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무서웠고, 이세돌이 고전 끝에 첫 판을 항복했을 때의 충격이 잊히지 않는다. 그날 저녁 야탑의 먹자골목에서 소주를 들이킨 건 바둑의 영역마저 기계에 내준 허전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기계의 계산 능력이 아무리 정교하더라도 인간의 창의성을 따라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기보를 입력해서 학습한 알파고가 변칙수에 정확히 대응할 수 없으리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알파고는 프로기사도 예상 못한 멋진 수를 두었고 결국 승리의 발판이 되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가장 확률이 높은 수..

길위의단상 2016.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