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51

힘이 있어야 싸우지

평생을 싸움 한 번 안 하고 살아온 부부도 있다지만 우리는 자주 티격태격한다. 그나마 젊을 때보다는 다투는 빈도나 강도가 줄어들었다. 퇴직을 했으니 얼굴 맞대고 살아가는 시간이 늘어났는데 이만만 해도 다행이지 싶다. 애정이 없으면 다툴 일도 없지 않은가. 아직 얼굴 쳐다보기 싫은 정도는 아니다. 다투는 원인은 주로 내 버럭, 하는 성질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큰소리부터 치니 서로 목소리가 높아진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순간적으로 화가 불같이 일어난다.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잠시면 족하다. 큰소리치는 사람이 이긴다고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반대다. 꼬리를 내리는 건 늘 내가 먼저다. 화도 잘 내고 용서도 쉽게 구한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뒤끝이 없어진 게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길위의단상 2019.11.11

인간의 위엄을 잃지 마라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통계를 보면 사람들이 내 블로그에 찾아오는 횟수가 하루에 500~900번 정도다. 가끔 1천 회가 넘기도 한다. 지난주에는 2천 회를 넘은 날이 있었다. 아주 드문 경우다. 어떤 검색어로 들어왔는가 봤더니 박노해의 '동그란 길로 가다'라는 시를 통해서였다. '동그란 길로 가다'는 2012년 5월에 블로그에 올렸는데, 하루에만 이 시를 검색해서 들어온 사람이 1천 명을 넘었다. 정경심 교수가 페이스북에 이 시를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이 확인차 내 블로그에 찾아온 것이다. 덕분에 시를 다시 읽어본다. 누구도 산정에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누구도 골짜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 삶은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 유장한 능선을 오르내리며 가는 것 절정의 시간은 짧다 최악의 시간도 짧다 천국의 기..

길위의단상 2019.10.23

처음 로또를 사다

시내와 집을 오가는 길에 로또 판매점이 새로 생겼다. 견물생심이라고 선명한 노란 불빛에 끌려 지난주에는 난생처음으로 로또를 샀다. 1만 원을 내니 작은 종이 두 장을 주는데 거기에는 기계가 찍은 10개의 숫자열이 적혀 있었다. 눈에 안 보일 때는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로또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물욕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지 걱정이다. 어제 당첨 숫자 발표가 나왔는데 당연한 결과겠지만 꽝이었다. 3개 번호만 맞으면 되는 5등에도 하나 걸리지 못했다. 우리나라 로또는 45개 숫자에서 6개를 맞히면 1등이다. 5개가 일치하고 보너스 번호를 맞추면 2등, 5개만 일치하면 3등, 4개는 4등(5만 원), 3개는 5등(5천 원)이다. 이런 자세한 내용은 이번에 로또를 사며 처음 알았다. 로또 당..

길위의단상 2019.10.13

너무 예민해

나는 소리에 예민해서 탈이다. 다른 데는 둔한 편인데 유독 소음에는 까다롭다. 그래서 사는 데 피곤하다. 도시에 살면서 소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디를 가나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 소음 공해라는 말도 있다. 소음에 오래 노출되면 대개 무감각해지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데, 나 같은 경우는 반대로 점점 예민해진다. 소음에 대한 면역이 약하다. (시골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조용한 곳을 찾아 시골살이할 때 옆집 개 때문에 잠을 설친 적이 많았다. 시골 마을의 개 짖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바깥에서 여러 명이 만나는 모임이 꺼려지는 이유 중 하나가 왁자지껄한 분위기 때문이다. 술이라도 몇 순배 돌면 각자 목소리가 커지고 시장 바닥처럼 변한다. 대화의 소재가 무엇이든 이 정도 되면 골치가 지끈거린다. 언제 ..

길위의단상 2019.09.22

파티마의 은총

포르투갈에 있는 파티마는 프랑스의 루르드, 멕시코의 과달루페와 함께 가톨릭의 3대 성지로 꼽힌다. 세 군데 모두 성모 발현지다. 1917년 5월 13일, 작은 마을 파티마에 살던 세 아이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셨다. 그 뒤로 10월까지 매월 13일에 여섯 차례나 발현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파티마 대성당을 비롯해 많은 기념 건물이 들어서 있는 천주교의 대표 성지다. 지난 6월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여행을 하면서 아내가 제일 가보고 싶어 한 곳이 파티마였다. 가톨릭 신자로서는 당연한 바람일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성지 인근에 있는 숙소에서 묵었고, 파티마에 머문 시간도 다른 팀에 비해 길었다. 그래서 아내는 세 번이나 성지를 찾을 수 있었다. 가던 날 오후에는 가이드의 안내로 성지 전반에 대한 설..

길위의단상 2019.09.16

진보와 보수

"보수의 윤리는 합법에 있다. 그러나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김규항 씨의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말이다. 요사이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정치 공방이 거세다. 조국 후보자는 진보적 지식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의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딸에 대한 의혹에 대해 그는 말했다. "적법한 행위였고 부정한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합법이나 적법은 진보에서 변명으로 쓸 말이 아니다. "진보의 윤리는 합법에 대한 질문에 있다." 김규항 씨의 발언은 정곡을 찌른다. 한때는 '강남 좌파'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제는 '진보 귀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진보 귀족은 말로는 개혁,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지만 삶은 전형적인 기득권층을 닮았다. 합법이라는 그늘 뒤로 숨어서 제 이득 챙기..

길위의단상 2019.08.23

헬스에 재미를 붙이다

단지 안에 헬스장이 있다. 입주 초기에는 무료였는데 지금은 출입할 때마다 500원씩 받는다. 사설 헬스장에 비하면 공짜나 마찬가지다. 입주민을 위한 복지 시설 중 하나다. 좋은 시설이 옆에 있지만 작년까지는 헬스장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자연과 벗하며 운동하며 되지, 기계에 의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가까이서 걷기가 필요하면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면 충분했다. 굳이 러닝머신을 탈 필요가 없었다. 나이가 들수록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단련한 근육을 유지하자면 계속 헬스장을 다녀야 한다. 무엇에 매이는 의무감보다는 차라리 근육이 없는 편을 나는 택했다. 요사이는 헬스장에서 진화하여 피트니스 센터라 부른다. 보기 좋은 몸을 만들려고 하면 전문 트레이너의 코치를 받아야 한다. 번거로..

길위의단상 2019.08.14

팔랑귀와 불신지옥

아내는 남의 말을 쉽게 믿는다. 방송에 나오는 내용도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TV는 온갖 건강과 의학 정보를 전한다. 몸에 좋은 약이나 음식이 있다고 하면 금방 솔깃해지는 모양이다. 아무 관심 없는 나까지 끌어들일 때가 많다. 내가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우리 집은 건강식품점을 차려도 될 것이다. 아내는 보이스 피싱에 걸려들기 쉬운 타입이다. 실제로 돈을 뺏기기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2천만 원을 갖다 바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휴대폰 배터리 덕분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배터리가 방전되어 사기범과 휴대폰 연결이 끊어졌다.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내는 제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한다. 나는 아내가 홈쇼핑 방송을 보는 게 제일 무섭다. 나도 유혹을 받을 때가 있는데 아내는 오죽하겠는가. 까짓..

길위의단상 2019.08.05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한 소견

점잖게 말하면 '수출 규제'이고, 사실은 '경제 보복'이다. 위안부 합의 사항을 파기한 것과, 개인의 불법 징용에 대해 일본 기업의 배상을 결정한 우리나라 대법원판결에 대한 불만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역시 아베다운 행동이다. 첫째, 정치 문제를 무역으로 보복하는 일본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일본은 한국 반도체 제조에 꼭 필요한 소재의 수출 길을 막으려 한다. 자기들만 가지고 있는 핵심 기술이니 대체재도 마땅치 않다.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고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에 타격을 가하려는 치졸한 짓이다. 이렇게 하면 세계 자유무역의 질서는 깨진다. 상대국 정책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외교적 노력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일본의 이번 수출 규제는 한국을 길들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이 명약관화하다. 껄끄러운 문재인..

길위의단상 2019.07.22

세상에 이런 일이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지진이 일어난 줄 알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고, 침대는 90도로 발딱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스페인 여행 중 새벽 3시에 어느 호텔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이 그때의 황당한 상황이다. 아무리 가장자리에 누워 있다 하더라도 침대가 뒤집어질 수 있겠는가. 소리에 놀라 옆 침대에서 자던 아내도 일어났다. 둘 다 어이없어했다. 아내는 침대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닌지 살펴봤지만 철제 다리는 이상 없었다. 설령 다리가 부러졌대도 한 편으로 무너지기만 하지 저렇게 발딱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기며 침대를 바로 세워 놓고 다시 잠이 들었다. 해외여행이라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침대는 구조상 ..

길위의단상 2019.07.10

젊은 여성에게 주는 충고

노파심이겠지만 결혼을 앞둔 젊은 여성에게 충고 한마디 하련다. 청춘 남녀들이 달콤한 연애 감정에 속아 짝을 잘못 선택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신중해도 부족한 것이 짝을 고르는 일이다. '싸움터에 나갈 때는 한 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평생의 반려자를 고를 때는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첫째, 너무 잘해 주는 남자는 일단 의심하라. 여자를 얻고 싶을 때 가면을 쓰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남자가 있다. 이런 남자는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대부분 권위적으로 돌변한다. 그 뒤부터는 고생과 후회의 시작이다. 대개 순진한 여성이 이 덫에 걸린다. 수컷의 친절..

길위의단상 2019.06.15

늙었다고 생각하는 나이

얼마 전에 갤럽에서 재미있는 자료를 발표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는 나이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60세로 세계 평균인 55세에 비해 높았다. 몇 나라별 평균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70세 한국 60세 영국 56세 미국 52세 독일 50세 일본 47세 중국 44세 대체로 유럽 국가가 높고 아시아 국가는 낮았는데, 한국은 예외로 높은 수치를 보였다. 일본과 중국은 밑에 처져 있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서 40대 중반에 벌써 늙었다고 생각하는 건 의외다. 늙었다고 느끼는 나이도 몇 개의 단계가 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으면 누구나 늙어가는 걸 느낀다. 그러나 그때는 의욕이 팔팔할 때다. 늙어가는 과정이지 늙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늙어간다는 ..

길위의단상 2019.06.03

언제까지 운전할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운전이다. 운전대를 잡으면 기분이 고양되면서 엔도르핀이 샘솟는다. 종일 운전해도 피곤하거나 질리지 않는다. 무엇이건 즐기면 힘든 줄을 모른다. 나는 즐기면서 운전을 한다. 젊었을 때는 드라이브가 취미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김없었다. 속력을 높여 고속도로를 달리면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렸다. 국도는 국도대로 달리는 맛이 있었다. 집 벽에는 대형 우리나라 전도가 걸려 있었는데, 내가 운전한 길은 빨간색으로 표시했다. 우리나라 전체를 빨간색으로 덮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안 간 길을 찾아 일부러 빙 돌아가는 일이 흔했다. 운전을 직업을 선택했다면 훨씬 더 인생을 즐길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언젠가 캐나다를 동서로 횡단하는 트럭 기사 스토리를 TV로 보았다. ..

길위의단상 2019.05.16

블랙홀의 그림자

지난달에 인류가 최초로 찍은 블랙홀 사진이 공개되어 화제를 모았다. 블랙홀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으니 직접 볼 수는 없다. 주변에 있는 물질이 블랙홀의 영향을 받아 격렬한 운동을 하면서 방출하는 전자기파를 통해 블랙홀의 존재를 유추한다. 간접적으로 볼 수 있으니 '블랙홀의 그림자'라고 부른다. 바로 이 사진이다. 이 블랙홀은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M87이라는 은하 중심에 있다. 붉은색이 블랙홀 주위를 회전하는 원반이고, 가운데 보이는 검은 영역이 블랙홀이다. 블랙홀에서는 '사건의 지평선'과 '특이점'이라는 용어를 알아두면 편하다. 고밀도로 압축된 천체는 중력이 엄청 강해서 주변의 시공간을 휘게 만든다. 그래서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게 되는데 그 경계..

길위의단상 2019.05.03

외국 사는 자식이 효자다

올해는 손주 돌보는 일에 매이게 되었다. 제 어미가 자격증을 따기 위한 교육을 1년간 받게 되어 손주를 유치원에 보내고 맞는 일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아침에 버스에 태워 보냈다가 오후 3시에 받으면 저녁 시간까지 맡아봐야 한다. 부부가 함께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손주 돌보미는 우리 나이 또래가 대부분 겪는 일이다. 자식이 맞벌이를 하면 제일 크게 부딪히는 문제가 육아다.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데가 조부모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잊을 만하면 TV에서 보모의 아동 학대 영상을 보여주니 도무지 남에게 맡길 수 없다 한다. 자식의 요청에 거절할 수 있는 부모가 있겠는가. 겉으로는 손주가 이뻐서 괜찮다지만 과연 속까지 그럴까. 며칠 전 지인이 하는 불평을 들었다. 딸이 쌍둥이를 뱄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

길위의단상 2019.04.19

새벽꿈

산속에서 혼자 사는 초등 동기 S에게 놀러 갔다(실제로 S는 소백산 깊은 곳에 살고 있다). 황토로 직접 지은 단칸방의 집인데 하룻밤을 같이 자게 되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귀곡산장처럼 으스스했다. 둘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밖에서 오래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며 찾으시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외면했지만 너무 간절하게 부르셔서 문을 열고 나갔다. 하얀 소복을 입은 외할머니가, 여기는 위험하니 빨리 도망가자고 하셨다. 안 그래도 꺼림칙하던 차에 외할머니를 따라가리라 마음먹고, 방으로 들어가 S에게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S는 정색하며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모두 잠가버렸다. 졸지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밖에서는 S가 외할머니를 해치는 소리가 들리고..

길위의단상 2019.04.10

미세먼지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미세먼지 수치부터 확인한다. 하루의 활동 여부가 그 수치로 결정된다. 집에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미세먼지 방지용 마스크가 몇 박스나 쌓여 있다. 그런 아내를 나는 호들갑 떨지 말라고 핀잔 주고, 아내는 무지하면 병을 키운다고 나를 타박한다. 외출할 때마다 '마스크를 써야 한다, 안 쓰겠다'로 서로 티격태격한다. 같은 공기를 마시지만 미세먼지를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내처럼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무딘 사람도 있다.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어떤 사람은 마스크를 쓰는 것이 미세먼지를 마시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말한다. 누구 말이 맞는지 헷갈린다. 미세먼지의 발생원부터 파악하는 게 우선일 텐데 그마저 정확한 데이터가 없다. 중국 영향이 몇 퍼센트인지부..

길위의단상 2019.03.29

봉은사 가는 길

사진작가 김희중 선생의 부음에 잠시 생각이 멎는다. 작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두 번의 개인전을 열 정도로 사진에 특출한 재능을 드러냈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가 동양인 최초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편집장을 지냈다. 우리나라 사진가 중 세계적으로 가장 큰 명성을 가진 분이다. 오래전에 작가의 자서전을 겸한 에세이인 를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김희중 작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봉은사 가는 길'이라는 작품이다. 바로 이 사진이다. 이 사진에 대해서는 작가가 촬영 당시 상황을 설명한 적이 있다. 1955년 7월에 뚝섬에서 야외 촬영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작가는 유일하게 교복을 입고 참가했단다. 모델 촬영이 싱거워 작가는 나룻배를 타고 한강 건너 봉은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

길위의단상 2019.03.15

아내와 나

아내는 현미를 좋아하고 나는 백미를 좋아한다 아내는 성당 옆에 살기를 원하고 나는 산속 외딴집에 사는 걸 꿈꾼다 아내는 혈관 계통이 약하고 나는 소화 기능이 약하다 아내 뇌의 80%는 자식이 차지하고 내 뇌의 80%는 나 자신이 차지한다 아내는 식탁에서 몸무게를 걱정하고 나는 식탁에서 소화제를 걱정한다 아내는 눈이 건조해 눈물약을 항시 넣고 나는 눈물이 많아 휴지가 옆에 있어야 한다 아내는 손주에게 인기가 있지만 나는 마지못해 손주가 안긴다 아내는 몇 시간을 뒤척어야 잠이 들고 나는 눕자마자 코를 곤다 아내는 사나흘에 한 번 응아를 하지만 나는 하루에 서너 번 들락거린다 아내는 TV 연예 프로를 좋아하고 나는 스포츠 중계를 좋아한다 아내는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나는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아내는 국..

길위의단상 2019.02.26

60.4kg

몸무게가 지금 같이 떨어진 것은 기억에 닿는 한 전에는 없던 일이다. 오늘 아침에 체중계에 올라갔더니 60.4kg이 나왔다. 작년 이맘때 66kg이 넘었으니 6kg이나 빠진 셈이다. 겨울에는 활동량이 줄어드니 보통 몸무게가 늘어난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반대다. 속병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서다. 소화가 안 되니 소식을 해야 하고, 기름진 음식은 먹지 못한다. 살이 안 빠질 수가 없다. 먹는 양을 생각하면 지금보다 더 빠져야 하는 게 맞다. 소화불량과 부글거림 증상이 이렇게 오래 가는 건 처음이다. 늙은이는 한 번 탈이 나면 회복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덕분에 좋은 점도 있다. 우선 몸이 가벼워서 경쾌하다. 65kg이 넘으면 둔하다. 느낌으로는 내 적정 체중이 61kg 내외인 것 같다. 나..

길위의단상 2019.02.15

축구와 국민성

나는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프로리그가 있다는 정도만 알 뿐, 무슨 팀이 있는지는 모른다. 축구 중계를 보는 일도 없다. 몸을 부딪치며 하는 경기는 대체로 싫다. 동료들이 축구를 하면 나는 벤치에서 구경하거나 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역할만 맡았다. 직접 축구를 한 기억은 두 번이다. 대학생일 때 MT에 가서 어쩔 수 없이 운동장에 나간 적이 있다. 강촌에 있는 한 초등학교였는데 후반에 교체 멤버로 들어가서 10분 정도 뛰었다. 전원이 참가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이때 날아오는 공을 헤딩하다가 죽는 줄 알았다. 머리가 띵 해서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축구 선수들이 어떻게 헤딩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저러다가 머리를 다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된다. 직장 생활을 할..

길위의단상 2019.02.02

트레커 10년

2008년 11월에 가입했으니 트레커와 함께 한지 10년이 넘었다. 일기장을 찾아 보니 그동안 함께 다닌 산과 길이 아련한 추억 속에 펼쳐진다. 10년 동안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많은 도움과 즐거움을 받았고, 그러면서 실망도 있었다. 10년 간의 산행 목록은 다음과 같다. 2008년 11월 강씨봉 12월 칼봉 2009년 1월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2월 고대산 3월 가리산 6월 백덕산 7월 두타연 9월 소백산 2010년 3월 금학산 7월 비학산 11월 구봉상 12월 정암산 2011년 3월 아차산, 도봉산 11월 금강소나무숲길 2012년 1월 대금산 3월 아차산 4월 북바위산 5월 응복산 10월 갈기산 2013년 2월 금병산 3월 보리산 7월 중원산 10월 금오도 비렁길 2014년 1월 칠장산 7월 가은..

길위의단상 2019.01.22

독감 2라운드

독감에 걸린 지 열흘째다. 재채기와 콧물이 흐르는 증세가 오늘은 더 심해졌다. 집에 같이 있던 아내에게도 독감 바이러스가 옮아갔다. 방 두 개가 병상이 되어 있다. 서로 에스컬레이터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쉽게 나을 것 같지 않다. 짜증이 많이 난다. 열흘 전 남한산성을 간 게 잘못이었다. 일행 중에 독감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거의 나아서 나왔다지만 온전하지 않은 몸이었다. 같은 A형 진단을 받았으니, 그로부터 감염된 게 확실하다고 합리적 의심을 해 본다. 안 좋은 일에는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니까. 감기에 걸린 사람은 제발 바깥출입을 자제하자. 생계를 위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친목 모임까지야 기어코 나갈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는 콜록거리면서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마스크는 남을 위..

길위의단상 2019.01.14

허술한 몸

겨우 기력을 회복해 컴퓨터 앞에 앉는다. 독감에 걸린 지 이레째다. 올겨울은 잔병을 달고 지낸다. 한 달여 전인 12월 초에 찾아온 위염이 시작이었다. 소화가 안 되니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연말까지 지냈다. 덕분에 송년 모임은 참석할 수 없었다. 몇 차례는 취해서 해롱거렸을 텐데, 금주한 효과는 있었다. 속을 겨우 진정시켰더니 이번에는 독감이 기습했다. 산행 뒤 몸살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A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4년 전에는 집에서 미적대다가 폐렴으로 발전해 열흘간 입원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겁이 나서 바로 병원을 찾은 게 다행이었다. 독감 증세는 이제 정점을 지났다. 하지만 몸은 축 늘어진 상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석증 증상이 재발했다. 너무 오래 침대에 누워 있었던 탓인지 고개를 돌리는..

길위의단상 2019.01.11

35년 된 셔츠

특별한 옷이 하나 있다. 35년 된 셔츠다. 장롱에 보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입고 있다. 천에는 보푸라기가 생겼고 소매 끝은 헤져서 밖에 입고 나가지는 못하지만 집에서 입기에는 아직 무난하다. 오래된 만큼 편안해서 좋다. 이젠 정이 들어서 조강지처처럼 버릴 수 없다. 이 옷에 얽힌 기억이 선명하다. 35년 전인 1984년 봄, 서울 변두리에 있는 M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새로 담임을 맡은 반의 한 학생의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오셨다. 그 학생은 몸이 가늘고 얼굴이 유난히 하얬다. 어머니 얘기로는 심장에 이상이 있어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담임이 잘 살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때 학생의 어머니가 선물한 옷이다. 셔츠 주머니에는 우산 모양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천의 감촉이 좋고 편해서 나들이..

길위의단상 2019.01.04

손주 돌보기

어제 모임에 나갔더니 세 명이 손주를 봐줘야 한다는 이유로 불참했다. 전체가 아홉 명이니 삼 분의 일이 손주에게 발목이 잡힌 셈이다. 우리 나이대에서는 흔한 모습이다. 자식과 손주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별로 없다. 자식이 결혼하고 손주를 낳게 되면 손주 봐주는 데 묶이게 되는 것이 한국 부모의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요사이는 대부분이 맞벌이라 누군가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 부모가 제일 만만하다. 어찌 된 풍조인지 부모나 자식 모두 당연한 일인 줄 안다.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만 해도 여자가 결혼하면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는 직접 키웠다. 출산 후 몸조리를 위해 잠시 부모의 도움을 받았지만 내내 신세를 지는 일은 없었다. 내 부모님이나 처가의 장인, 장모님도 각각 다섯 형제를 두었고 손주만 스무 명이지만 손..

길위의단상 2018.12.28

로이터 선정 올해의 사진

로이터통신이 올해를 대표하는 사진 100장을 선정했다. 로이터통신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밝은 뉴스보다는 어두운 뉴스가 많지만 보도사진의 특성상 어찌할 수 없는 것 같다. 어느 해나 그렇지만 내전이나 테러, 자연재해 사진이 주를 이룬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사진을 골라보았다. 우리나라 관련 사진도 5장이나 된다. 하와이 킬라우에아 화산에서 흘러내리는 용암(5월). 내전중인 시리아의 한 마을에서 아이가 가방 안에서 자고 있다(3월). 그린랜드에서 녹고 있는 빙산(6월). 미투 운동이 활발한 한 해였다. 우리나라도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갔다. 뉴욕 재판소에 들어가는 하비 웨인스타인(5월). 미국은 더 힘이 세지고 있다. 미 육군 훈련을 참관하는 트럼프 대통령(8월). 나치의 망령은 아직 살아 있..

길위의단상 2018.12.16

한 장의 사진(25)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외손녀는 두 주에 한 번씩 찾아와서 자고 간다. 이번에 와서는 엄마 옛날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한다. 두 딸이 시집을 갔지만 가족 앨범은 우리 집에 있다. 제 엄마와 같이 앨범을 펴놓고 엄마가 설명하는 얘기를 들으며 깔깔댄다. 그러더니 내 방에 와서 앨범에서 꺼낸 사진 한 장을 내민다. 30년쯤 전에 찍은 것이다. 어린 손주가 보기에 제 엄마와 외할아버지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나 보다. 엄마가 꼭 제 나이만 할 때 모습이다. 이때가 1987년이던가, 아니면 1988년이리라. 내 나이는 30대 중반, 품에 안긴 첫째는 예닐곱 되었으리라. 아마 겨울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던 기차 안 모습 같다. 그때는 방학이 되면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 내려가서 열흘 정도 지냈다 왔다. 자가용이 없..

길위의단상 2018.12.06

달 착륙 조작이 가능한가

과거에 물리 선생을 하다 보니 현장에 있을 때 아이들로부터 달 착륙이 조작된 게 아니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실제 달 착륙을 생중계로 지켜본 나로서는 인간이 달에 발을 디딘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무엇이건 의문을 품고 검증하는 것은 좋지만,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너무 쉽게 가짜로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달에 갔다 오는 자체가 워낙 기적 같은 일이다 보니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조작이라고 믿어버리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한 것 같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달 착륙 조작이 과연 가능할까. 아폴로 11호부터 17호까지 달에 간 우주인이 열 명이 넘는다. 그들과 직접 관계된 사람이 수백 명은 될 것이다. 음모론자 주장대로 달 착륙 장면이 세트장에서 촬영되었다면 그 과정에 관..

길위의단상 2018.11.29

말 많은 수능

올 수능도 뒷말이 많다. 고작 몇백 명 대상의 학교 시험에서도 이러쿵저러쿵 시빗거리가 생기는데 한꺼번에 60만 명이 시험을 치르는 수능은 오죽하겠는가. 쉬우면 쉬운 대로,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뒷말이 안 생긴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가장 논란이 된 문제는 국어 영역 31번이다. 한 페이지에 걸쳐 긴 지문이 나오고 그에 딸린 문제가 여섯이다. 그중에 31번이 너무 어렵다고 해서 아우성이다. 도대체 어떤 문제인지 궁금해 찾아보았다. 우선 지문이 이렇게 길다. 근세에 등장한 동서양 우주론에 대한 설명이다. 배경 지식이 없는 사람은 상당히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 31번이 나온다. 이 문제를 보니 만유인력 개념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즉, 만유인력은 두 질량의 ..

길위의단상 2018.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