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51

친일과 대한민국

친구가 카톡으로 긴 글을 보내 주었다. 글쓴이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최진석 선생이다. 전에 EBS를 통해 선생의 노자 강의를 감명 깊게 들었던 적이 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념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성숙한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은 견뎌내야 할 통과의례인지 모른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언젠가는 발목을 잡는다. 친일과 반일에 관련된 논란도 그중 하나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독단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지만 선생의 견해 역시 경청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가을호에 실린 따끈따끈한 글이다. 친일과 대한민국 / 최진석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꿈꾸는 나는 작년 7월에 발표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

길위의단상 2020.09.01

시무7조 상소와 하교문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시무(時務)7조 상소문'이 화제다. 글쓴이는 진인(塵人) 조은산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필력을 갖춘 분이 아닌가 싶다. 이분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글재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 글을 옮겨 적다 보니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이 무척 아쉽다는 걸 느낀다. 보수의 첫째 가치는 공동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민족을 경시하고 사리 추구와 외세 의존이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일부 극우의 사상이 점점 확산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분 글의 오독인 줄 모르지만, 내 가진 것을 앗기기 싫다는 혜택받은 자의 억지투정으로 읽힌다. 사악하다고까지는 차마 말하지 않겠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양극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위의단상 2020.08.30

태풍 바비

태풍 바비(Bavi, 8.22~8.27)가 지나갔다.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는데 다행히 큰 피해 없이 통과했다. 기상청에서는 역대급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번에도 기상청의 과장 예보가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 태풍만이 아니라 기상청 예보가 지나치게 오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게 반복되면 기상청은 양치기 소년이 될 수밖에 없다. 조심하라고 외쳐도 국민은 별로 안 믿게 된다. 기상청은 과학이다. 오직 데이터로 말해야 한다. 예측이 잘못되어 욕을 먹더라도 사실대로 전하는 게 옳다. 기상청은 이번 태풍의 크기 예측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했다. 폭풍반경을 보면 거의 배 가까이나 틀렸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가 봐도 바비는 그렇게 덩치가 큰 태풍이 아니었다. 수도권에서는 출근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막상 태풍..

길위의단상 2020.08.28

질긴 장마

2020년은 코로나와 함께 질긴 장마의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중부 지방의 장마는 어제 8월 16일에야 끝났다. 6월 24일부터였으니 무려 54일간 지속한 최장기간 장마였다. 그전 기록은 2013년의 49일이었다(6.17~8.5). 또한 장마가 가장 늦게 끝난 해로 기록이 남게 됐다. 1987년 장마가 8월 10일에 끝났는데, 그때보다 무려 6일이나 더 오래 끌었다. 특히 7월 하순부터 장마 끝날 때까지는 거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내리 비가 내렸다. 땡볕 더위는 피했지만 후덥지근한 습도 높은 날씨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올 장마의 전국 누적 강수량은 920mm로 역대 두 번째 기록이었다. 질긴 장마와 비로 인한 피해도 컸다. 마치 전염병과 기상 이변은 연관되어 있다는 걸 하늘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길위의단상 2020.08.17

생각하는 재미

바둑만큼 생각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놀이도 없다. 내가 바둑을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생각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수칙은 바둑에도 예외가 아니다. 어려운 장면을 만나서 장고를 하면 빨리 두라고 채근하거나, 심하면 짜증을 낸다. 같이 느긋하게 바둑을 둘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 어렵다. 요사이는 거리에서 기원을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인터넷 바둑이 대세다. 인터넷 바둑의 특징은 속전속결이다. 대부분 제한시간이 5분, 아니면 10분이다. 이 정도면 금방 제한시간이 지나가고 바로 10초 초읽기에 들어간다. 10초에 한 수씩 두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시간에 쫓기며 허둥대다 끝난다. 속기 바둑은 실력보다는 순발력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길위의단상 2020.08.09

책 읽는 소리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유별난 사랑을 받았다. 그 시절에 일흔이 되어서 첫 손자를 봤으니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이 오죽했겠는가.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버릇없이 자랐다 해도 할 말이 없다. 할아버지 수염을 잡고 "이랴 이랴" 하면, 할아버지는 엉금엉금 기면서 내가 끄는 대로 따라다니셨다. 수염이 뽑혀도 그저 좋아라 하시며, 손자를 위해서라면 어떤 악역이라도 마다치 않으셨다. 동네 사람들이 희한한 구경거리가 났다고 모여들었다 한다. 사랑방에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자주 놀러 오셨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깨우쳤을 때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으로 나를 부르시고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또래보다 앞서 글자를 익힌 손자를 자랑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동갑내기보다 나는 먼저 학교에..

길위의단상 2020.07.30

서울 집값

노무현 정권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진보 정권을 자칭하는 무리가 집권하면 부동산이 한바탕 춤을 춘다.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고 주로 서울에 국한되지만, 서민을 위하겠다는 정부가 서민의 가슴에 허탈과 좌절의 대못을 박고 있다. 도대체 문재인 정권이 집값을 잡을 의지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집값을 잡겠다는 시늉만 하는 것 같아 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청와대 참모부터 다주택을 처분하겠다고 한 약속이 언젠데 아직도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다가 다급해지니 무슨 수석이라는 자는 두 채 중 강남 집은 그대로 두고 지방에 있는 집을 팔겠다고 한다. 눈속임도 격이 있어야지, 이런 질 낮은 코미디는 없다. 구중궁궐에 있는 몇 명이서 집이 한 채니 열 채니 싸우지 말고 정책이나 제대로 세워라. 국민은 속으로 비아냥거린다..

길위의단상 2020.07.06

해 뜨는 집

고등학교에 다닐 때 토요일 4교시는 HR이었다. HR은 'Home Room'의 약자로 글자 뜻과는 상관없이 학급 회의를 하는 시간이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면서 회의 절차는 따랐으나 거의 형식적이었다. 회의 내용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는 아이가 없었다. 발언도 거의 농담 따먹기 식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회의를 시작하는 것만 보다가 교무실로 내려가셨다. 그러면 반장은 적당히 회의를 마무리하고 칠판에 'Home Room' 대신 큼지막하게 'Happy Recreation'이라 바꿔 적곤 했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2학년 때 반장이었던 Y는 오락부장을 겸했는데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자는 주의였으므로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었다. 'Home Room'에서 'Happy Recreation'으로..

길위의단상 2020.06.23

여기 있는 게 좋아

텃밭을 부치는 이웃이 세 집이나 있다. 덕분에 야채는 떨어지지 않고 얻어먹는다. 연초에 아내가 우리도 텃밭을 하나 해 볼까, 라고 했는데 나는 거절했다. 여기는 조건이 좋다. 집 가까이에 노는 땅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경계를 긋고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작물 가꾸는 것도 시들해졌다. 귀찮기도 하고 무엇에 매인다는 게 싫다. 대신 이웃이 부치는 텃밭은 가끔 들린다. 오늘 오후에 텃밭에 나가는 이웃을 따라나섰다. 방 한 칸 정도 되는 넓이의 땅뙈기에는 상추, 배추, 쑥갓, 완두콩, 고추, 딸기가 심겨 있다. 주변에는 고만고만한 텃밭들이 있고, 가끔 밭에 나와 있는 다른 사람과도 만난다. 오늘은 할머니 한 분이 옆에서 일하고 계셨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이웃분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

길위의단상 2020.06.13

두 견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공평무사한 입장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누구나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과 현상을 본다. 심하게 말하면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객관적이면서 공평한 잣대는 없다. 컵이라는 실체가 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사각형으로 보이기도 하고 둥글게 보이기도 한다. 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컵을 둥글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사각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중의 하나다. 작금의 윤미향 사태를 보면서 솔직히 뭐가 뭔지 헷갈린다. 보도를 보면 윤미향은 시민운동을 가장한 사기꾼 같아 보이다가도, 다른 편 말을 들어보면 의혹 제기가 마녀사냥식으로 너무 지나친 것 같다. 만약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면 당사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검찰 수사가 들어갔으니 내가 여기서 왈가..

길위의단상 2020.06.10

낮에 나온 반달

오후에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반달이 떠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원 모양의 달이 또렷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중학교에서 물상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태양과 달의 운동 단원이었던 것 같다. 한 아이가 질문했다. "선생님, 달은 낮에 볼 수 없나요?"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럼 볼 수 없지. 낮에 달이 떠 있어도 하늘이 너무 밝기 때문에 달은 안 보이는 거란다." 이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걸 몇 년이 지나서야 눈치챘다. 명색이 과학을 전공한 선생이 낮에 뜬 달을 본 적이 없었다니. 아니, 봤더라도 그러려니 했지 앎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낮에는 해, 밤에는 달이라는..

길위의단상 2020.05.31

지적 생명체 실험 실패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실제 주인은 유전자다. 유전자가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 지적 존재인 인간을 이용할 뿐이다. 처음부터 지적 존재가 되도록 계획하고 유도한 주체는 유전자다. 인간은 오로지 '유전자 기계'에 불과하며, 유전자의 이기성이 제일 잘 발현된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다. 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내용이다. 지구는 살아 있다. 지구는 토양과 대기, 해양과 생물 생태계를 포함해서 조화롭게 작동하는 신성하고 지성적인 존재다. 지구는 유기체처럼 스스로 진화하고 발전해 나간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무기물은 생존에 적합한 방향으로 지구의 상태를 조절 유지해 왔다. 만약 지구 시스템을 파괴하는 요인이 생기면 지구는 그를 제거할 것이다. '가이아 이론'이다. 두 이론이 상충하는 듯 보이지만 지구의 위기 상황이..

길위의단상 2020.05.16

낮술

낮술 맛을 알게 된 건 퇴직하고 난 뒤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낮술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술은 퇴근한 뒤 저녁에 마시는 거였다. 여러 사람이 모여 왁자지껄한 가운데 직장 얘기를 안주 삼아 스트레스를 푸는 게 대부분이었다. 술맛을 음미하기에 적당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퇴직하고 나니 낮이 제일 한가한 시간이 되었다. 심심하다 보니 반주로 몇 잔 홀짝이게 된다. 집에서 마시는 낮술이 직장 다닐 때와 다른 점은 시간상의 차이와 함께 대작하는 사람의 유무다. 대개 혼자이고 가끔 아내가 앞에 앉기도 한다. 집에서 마시는 낮술은 조용한 가운데 술맛을 느끼면서 취해가는 과정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내 낮술을 방해하는 것은 바깥에 있지 않다. 기분 좋다고 연달아 낮술을 즐기다가는 이내 위..

길위의단상 2020.04.21

짜릿한 개표 방송

어제 실시한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 전국 253개 지역구에서 민주당이 163석, 통합당이 84석, 정의당이 1석, 무소속이 5석을 얻었다. 민주당의 압승, 통합당의 참패다. 어느 선거나 결과가 조마조마하지만 이번 총선은 유례없는 진영 대결이 벌어져 더 흥미로웠다. 선거에서는 국민이 심판관이다. 이번 총선은 국민이 확실하게 민주당 손을 들어줬다. 통합당의 정치 행태에 환멸을 느낀 국민이 많았다는 얘기다. 민심이 어떠한지 통합당은 잘 성찰해야 할 것이다. 제발 우리나라 정치도 한 단계 더 성숙해졌으면 좋겠다. 막말을 일삼는 정치인도 사라져야 한다. 이번에 그런 의원들 대부분이 낙선한 건 다행한 일이다. 이래서는 표를 못 받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줬다고 생각한다. 21대 국회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

길위의단상 2020.04.16

희망사항

보통 진보와 보수를 나눌 때 민주당은 진보, 통합당은 보수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내 기준으로는 민주당이나 통합당이나 모두 보수다. 민주당은 약간 진보적 색채를 띤 보수당이고, 통합당은 오른쪽으로 치우친 보수당이다. 진보라고 하면 정의당이나 녹색당, 민중당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이나 통합당은 기득권층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민주당보다는 통합당이 훨씬 심하지만, 통합당과 다르다고 민주당을 진보라고 하기는 어렵다. 재벌이나 부동산을 대하는 엉거주춤한 자세, 특히 성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보면 그렇다. 진보라면 사회가 다소 혼란을 겪더라도 복지나 평등, 정의의 문제에서 원칙을 견지하고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말이나 구호만이 아니라 정치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도 마땅..

길위의단상 2020.04.13

머스크의 테러

어느 분이 얼마 전에 찍은 별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사진 가운데로 낙서를 한 것처럼 흰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분의 설명으로는 머스크의 스페이스X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 여러 대가 열을 지어 이동한 흔적이라고 했다. 사진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그분 입장에서는 '머스크의 테러'라고 부를 만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야심을 가진 사업가다. 그가 꿈꾸며 실행하는 스케일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 불허다. 그중 하나에 '스타링크 프로젝트(Starlink Project)'가 있다. 인공위성으로 세계 전역을 인터넷으로 연결하겠다는 프로젝트다. 2027년까지 지상 550km의 우주 궤도에 인공위성 12,000개를 올려서 사막이나 극지방 등 지구 어디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초고속 인터..

길위의단상 2020.03.30

정릉의 추억

고3이 되면서 정릉으로 이사를 했다. 돈암동에서 살던 단칸방이 비좁은 데다 골목에 붙어 있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공부에 집중할 시기에 조용한 환경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구한 방은 정릉에 있었다. 도봉산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로 가까이에 '청수장'이 있었고, 서울이지만 시골 분위기가 나는 마을이었다. 전에 살던 데에 비하면 이사한 집은 대궐이었다. 터가 엄청 넓었고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집 뒤가 바로 도봉산 자락이었다. 외할머니와 내가 살 방은 별채로 되어 있어 주인집과 떨어져 있었다. 세를 주기 위해 최근에 지었다고 했다. 방이 넓었고 무엇보다 완벽하게 조용했다. 비록 셋방이었지만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다만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 버스를 30분 이상 타고 가야 했다. 다행히 ..

길위의단상 2020.03.21

텅 비었다

하필 이 시국에 이빨이 고장 났다. 진통제로 버티지만 머리까지 욱신거리며 아프다.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 이상이 나타난 건 서너 달 전이었다. 딱딱한 걸 씹으면 통증이 오는 정도였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전에 다른 이빨도 그런 식으로 몇 달 참았더니 증상이 사라졌다. 이번에도 병원에 가지 않은 채 나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웬걸, 나흘 전에 갑자기 통증이 찾아왔다. 아프면 어느 부위나 고통을 주지만 치통도 만만치 않다. 심해졌다 약해졌다 주기적으로 괴롭힌다. 죽으로 연명하면서 음식물 온도도 잘 맞춰야 한다. 조금만 뜨겁거나 차가워도 안 된다. 인상 쓰면서 밥을 먹어야 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단골 치과는 상가 건물 3..

길위의단상 2020.03.10

자방 격리

살짝 몸살기가 찾아왔다. 사흘 전에 물빛공원을 걸을 때 찬 바람이 불어서 좀 걱정이 되긴 했다. 콧물이 흘렀고, 몇 번 재채기도 나왔다. 그 뒤로 머리가 띵 하며 몸이 나른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환절기 연례행사를 치러야 하나 보다. 코로나19로 개학이 연기된 손주가 집에 와 있어 나는 어쩔 수 없이 자가 격리보다 더 센 자방(自房) 격리 중이다. 만에 하나 코로나19라면 큰일 날 일이니 문 닫고 방안에 갇혀 있다. 덩달아 치통까지 찾아와 요사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산다. 몸살기라도 사라져야 치과를 갈 텐데, 그저 진통제를 먹으며 버틸 수밖에 없다. 이런 시기에는 몸이 아프면 더더욱 안 된다. 코로나19의 발원지인 중국은 기세가 상당히 수그러들었다. 한창때 수천 명씩 나오던 확진자 수가 지금은 백 단위로 줄..

길위의단상 2020.03.06

릴라 아가씨와 바둑 두기

컴퓨터에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깔았다. 여러 인공지능 엔진이 들어 있는 통합팩이 있어 비교적 간편하게 설치할 수 있었다. 이제 나도 집에서 손쉽게 인공지능 바둑과 놀 수 있게 되었다. AI가 인간 바둑에 도전한 것이 2016년이었다. 알파고가 당시 세계 최고수였던 이세돌 프로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아무리 컴퓨터라 할지라도 바둑에서 인간의 창의력이나 상상력을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라고 대부분이 생각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길 날은 먼 미래라고 믿었고, 이세돌의 압승을 예상했다.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이세돌은 다섯 판 중에서 어쩌다 겨우 한 판을 건졌을 뿐이었다. 그 뒤로 더욱 진화한 인공지능은 인간 기보의 도움 없이 자기 스스로 학습해서 이제는 넘사벽의 경지에 이르렀다. 프로 최고수가 두..

길위의단상 2020.03.01

지구 - 창백한 푸른 점

인간이 만든 물체 중 가장 멀리 나아가고 있는 것이 보이저 1호다. 보이저 1호(Voyager 1)는 1977년 9월에 발사되어 1990년에 명왕성을 지났고, 지금은 태양계를 벗어나 성간공간을 여행 중이다. 현재 위치는 지구에서 약 150AU(220억km) 떨어져 있다. 태양계 지름의 두 배에 해당하는 거리다. 보이저 1호는 명왕성을 지날 때 태양계 끝에서 본 지구 사진을 찍었다. 1990년 2월이었으니 꼭 30년 전이다. 지구에서 60억km 밖에서 본 우리 지구 사진인데, 이 희미하게 빛나는 영상을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명명했다. 촬영 30주년을 맞아 이 사진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NASA에서는 옛 사진을 더 선명하게 보이도록 보정하여 다시 발표했다. 보일..

길위의단상 2020.02.22

다람쥐가 되어 간다

# 1 공돈 20만 원이 두 달 전에 생겼다. 요긴할 때 쓰려고 책장에 있는 책 속에 감추어 두었다. 젊을 때부터 책 속에다 비상금을 숨겨 두곤 했다. 책 제목만 기억하고 있으면 아무 때나 꺼낼 수 있으니 비밀 보관함으로는 제격이었다. 아내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의심이 간다고 많은 책을 전부 꺼내 볼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에 돈이 필요해서 책장 앞에 섰다가 난감한 일이 생겼다. 어디에 넣어 두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안 났다. 손이 자주 가는 책을 중심으로 찾아봤지만 허탕이었다. 아무리 두 달 전 상황을 더듬어도 깜깜했다. 그렇다고 모든 책을 뒤져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 들락날락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20만 원은 훗날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졌다. # 2 도서관에 갈 때마..

길위의단상 2020.02.06

설날 세 장면

# 1 귀성길에 저녁을 먹기 위해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 된장찌개를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옆자리에 한 가족이 앉았다. 40대 부부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들 둘이었는데 전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명절 전 휴게소 분위기가 대체로 그렇다. 설빔을 차려입고 환한 미소를 띠고 기차에 오르는 TV에 나오는 명절 풍경을 나는 믿지 않는다. 이 가족은 그중에서도 유별나서 눈길이 갔다. 두 아들은 휴대폰만 붙잡고 있고, 부부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딴 데만 쳐다보고 있었다. 음식이 나오자 각자 제 몫을 가져와서는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했다. 각자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남편한테서는 서운하면서 뭔가 미안해하는 기색도 보였다. 저 나이였을 때 우리 가족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은 억지로 따라나서고, 아내..

길위의단상 2020.01.27

타이젬 4단

기원에서 모여 바둑 두는 모임이 해체되고 난 뒤 심심해졌다. 바둑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인데 1년 넘게 바둑 둘 기회가 안 생겼다. 아는 사람 중에 바둑을 즐길 수담 친구는 없다. 있다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갈 것이다. 요사이는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 바둑은 편리하면서 상대가 많아서 좋다. 컴퓨터만 있으면 중국이나 일본 사람과도 대국할 수 있다. 전에 인터넷 바둑을 둬 봤지만 내 스타일과는 맞지 않아 곧 접었다. 인터넷 바둑은 속기로 너무 호흡이 빠르다. 장고파인 나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두 번째는 바둑 두는 맛이 나지 않는다. 바둑판 위에 돌을 놓을 때의 감각과 소리가 없다. 인터넷에도 전자음 효과가 있지만, 실제 나무 바둑판 위에 돌이 접촉하는 맑고 경쾌한 소리를 따라올 수..

길위의단상 2020.01.20

세상에서 제일 공평한 것

해가 바뀌면서 누구나 똑같이 한 살이 보태진다. 찰나의 어긋남도 없다. 세상에서 제일 공평하다.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한숨 쉬며 억울해 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을 충실히 못 살고 있다는 반증밖에 안 되는 짓이다. 강남에 사는 누구는 아파트값이 껑충 뛰었고, 지방에 사는 아무개는 도리어 값이 내려갔다. 같은 서울에서도 편차가 크다. 배가 아픈 게 인지상정이다. 만약 나이 먹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되겠는가.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은 한 살이 늘어나는데, 깡촌에 산다고 열 살이나 더 먹는다면 억울하고 분통 터질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사 중에서 흐르는 세월만큼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똑같이 나이 들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그러나 미래에는 ..

길위의단상 2020.01.05

근육 기르는 재미

올해는 산행이나 걷기에서는 낙제점이다. 다른 해에 비하면 활동량이 반 토막이 났다. 대신 헬스장에서 재미를 발견했다. 운동 영역이 야외에서 실내로 바뀌었다고 하겠다. 헬스장 안에 '인바디(InBody)'라는 체성분분석기가 있다. 원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몸의 체성분, 골격근과 지방, 비만 등을 진단한다. 우연히 그 위에 올라섰는데 골격근과 체지방량이 표준 범위 밖으로 나왔다. 골격근은 뼈에 붙은 근육으로 신체 활동이나 운동과 관계있다. 25kg 이상이 표준인데, 나는 21kg으로 미달이었다. 근육 운동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체지방도 표준을 한참 벗어났다. 그래서 목표가 생겼다. 늙을수록 근육이 중요하다는 데 최소한 표준값의 하한치에는 걸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근육 운동을 ..

길위의단상 2019.12.28

2019 왕립학회 과학사진

영국 왕립학회에서 2019년 과학사진 입상작을 발표했다. 왕립학회는 매년 마이크로 이미지, 천문, 기후, 동물 행동, 생태와 환경 등 다섯 개 부문의 사진을 공모한다. 그중에서 올해의 수상작 일곱 작품을 골라 보았다. 1. 마이크로이미지 부문, '양자 물방울' 마이크로이미지 부문 수상작이면서 전체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15Hz로 진동하는 실리콘에서 실리콘 오일 방울이 튀어오르는 모습이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현상이라는데,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 잘 모르겠다. 2. 천문 부문, '달무리' 벨라루스의 사진작가가 찍은 밤의 달무리다. 숲 속 호수 위에 생긴 달무리가 거대한 우주의 눈동자 같다. 3. 기후 부문, '유콘의 트위스터' 토네이도가 생기기 직전에 하늘에는 이런 형태의 구름이 나타난다고 한..

길위의단상 2019.12.18

2019 기상사진 작품

연말이 되니 여러 사진 공모전의 수상 작품이 발표되고 있다. 그중 영국 기상학회가 주최하는 2019년 기상사진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을 소개한다. 기상사진의 단골 소재는 구름이다. 이번에도 재미있는 모양의 구름 사진이 여럿 올라왔다. 아이슬란드에서 찍은 유빙 위에 떠 있는 원반 모양의 구름이다. 외계인이 타고 온 우주선 같다. [Canon EOS 5D, 24-70mm, f/11, 1/13] 알프스 산맥 위에 떠 있는 구름으로 고산 지대에서 생기는 전형적인 모양이다. 곧 눈 폭풍이 몰려올 것이다. 개을 데리고 산책할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있어야 이런 행운도 잡을 수 있다. [Nikon D610, Tamron 28-75, f/10, 1/500] 새벽 운해. 촬영 데이터를 보니 30..

길위의단상 2019.12.05

호인보다는 까칠한 사람이 낫다

모든 이들과 두루 사이좋게 지내며 성격이 좋은 사람을 보통 호인(好人)이라고 부른다. 사전에서는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본바탕이나 됨됨이가 좋은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덩치가 있으면서, 서글서글하고 밝은 풍모를 가진 모습이 대체적인 호인의 이미지다. 무슨 일을 당해도 허허 웃으며 화를 내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저 사람은 호인이야."라고 말할 때는 상찬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그러한 호인의 긍정적인 평가에 딴지를 걸고 싶다. 우선, 호인의 특징은 무색무취하며 제 색깔이 없다. 그래서 무골호인(無骨好人)이란 말이 생겼다.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호인은 대체로 체제 지향적이며 보수적이다. 호인의 철학은 '좋은 게 좋은 것'이다. 내가..

길위의단상 2019.11.26

감기 불청객

몸이 부실해서 한 해에 두 번은 감기에 걸린다. 주로 가을에서 봄 사이에 찾아온다. 올 초겨울에는 독감에 걸려서 한 달 정도 고생했다. 그 뒤 봄에 또 한 번 감기에 걸렸고, 이번 가을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일부러 무리한 일을 피하고 조심하는 데도 불청객은 어김없다. 며칠 전 사위와 밖에 나가 당구를 치고 맥주 두 잔을 마시고 밤거리를 걸은 게 전부였다. 다음 날 기력이 빠진 걸 느꼈지만 설마 감기에게 틈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를 가지고 콜록거린다면 세상 사람들은 매일 감기를 달고 살아야 할 것이다. 아프면 절실히 느낀다. 몸 튼튼한 사람이 제일 부럽다. 나는 선천적인 약골이다. 무리하면 어떤 후유증이 오는지 잘 안다. 그래서 조심하는 편인데 모르는 사람들은 엄살을 부린다고 말..

길위의단상 2019.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