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863

내 어릴 적 겨울에는

우리 아파트 단지에는 젊은 부부가 많이 산다. 같은 층에 사는 네 가구만 봐도 노인은 우리뿐이고 다른 세 집은 3, 40대 부부 가정이다.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 아이들도 여섯 명이나 된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이들 보기는 힘들다. 등교할 때 잠깐 북적이지만 다른 시간에는 조용하다.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코로나 이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제일 넓은 공터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도 운동하기 위해 나온 어른들이 많지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손주를 봐도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집에서 엄마와 둘이 지내는 시간이 많다. 친구와 노는 시간은 태권도학원에 나가서다. 요사이 아이들은 제멋대로 뛰어노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화된 틀에 따라 움직인다. 그걸 보면 붕어..

길위의단상 2021.01.03

음치는 서러워

전 직장 동료 다섯이 모이는 작은 모임이 있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봄에 한 번 만난 뒤로는 대면 모임을 갖지 못했다. 대신 단톡방에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눈다. 며칠 전에 A가 55년 전 중학생 때 일화를 하나 올렸다. 그때 기말고사 음악 시험은 실기평가로 한 사람씩 선생님 앞에 나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지정곡은 홍난파의 '고향 생각'이었다. 반 전체의 평가를 마친 후 음악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음악 점수 '양'을 줄 수는 없다. 70점이 안 되는 학생은 다시 한번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그러면서 재시험 볼 학생 이름을 불렀는데 일고여덟 명 속에 A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노래에는 자신이 없었다. A는 다시 노래를 불렀고 가까스로 음악 점수 '미'를 받았다는 얘기..

길위의단상 2020.12.26

어떤 실수

겨울이 되면 피부가 건조해진다. 특히 다리 부위가 간지럽고 꺼칠하다. 보름 전쯤 아내에게 피부 보습제를 부탁했더니 병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발라보니 전과 달리 끈적끈적한 게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지만 아내가 좋은 거라고 말했으니 의심 않고 두 주 정도 열심히 사용했다. 그런데 가려움증이 없어지지 않고 도리어 더 자주 긁게 되었다. 다리를 살펴보니 붉은 반점이 쫙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수상쩍어서 병을 봤더니 이런, 이건 보습제가 아니라 바디와셔였다. 샤워하고 비누기를 없앤 다음에 다시 비누를 잔뜩 바른 셈이었다. 피부 트러블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몸 전체에 바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병을 보니 착각하게도 생겼다. 상표 이름만 영어로 크게 적혀 있고, 내용물에 대한 한글 설명은 깨알 같은 ..

길위의단상 2020.12.15

2020 천체사진

영국 그리니치천문대에서는 매년 천체사진을 공모한다. 전 세계에서 출품한 우수한 사진을 많이 볼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올해 수상작 중에서 눈에 띄는 몇 작품을 골라 보았다. 1. 오로라 부문 - Lone Tree under a Scandinavian Aurora(Nikon D850, 15mm, ISO 1000, 13s) - Hamnoy Lights(Nikon Z7, 17mm, ISO 800, 10s) 요사이 사진에 푹 빠진 친구가 아이슬란드로 오로라 사진을 찍으로 간다고 한다. 원래는 올 겨울이었는데 코로라 때문에 내년으로 미루어질 것 같다. 나도 그 팀에 끼워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2. 태양 부문 - Total Solar Eclipse, Venus and the Red Giant Betel..

길위의단상 2020.12.06

승리의 키스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항복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뉴욕 메디슨 스퀘어 광장에는 축하하는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서로 환호하고 키스하며 기쁨을 나눌 때 한 커플의 열정적인 키스가 사진기자인 에이젠슈테트(A. Eisenstaedt)의 렌즈에 담겼다. 에 실려서 유명하게 된 '승리의 키스'다. 해군 복장을 한 군인과 그의 연인이 재회하며 뜨겁게 키스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상은 다르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둘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애인과 술을 마신 뒤 거리로 나온 남자는 무조건 지나가는 여자를 붙들고 키스를 했다. 이 모습이 기자의 눈에 포착되었고, 마침내 하얀 복장을 한 간호사와 키스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피사체의 옷 색깔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고 한다. 만약 여자의 복장이 어두..

길위의단상 2020.11.25

두 에피소드

아침을 먹은 뒤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는데 출연자들이 얼굴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중 한 사람이 자신이 젊을 때는 동안(童顔)이라는 소리를 늘 들었는데, 나이가 드니까 반대로 다른 사람보다 빨리 노안(老顔)이 되는 것 같다고 한다. 나도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언뜻 그에 얽힌 두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 1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나선 게 스물 세 살이었다. 만으로는 스물둘에 선생을 시작했다. 또래보다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군대도 가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나 역시 동안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해 겨울에 예비고사 감독관을 나가게 되었다. 시험 전날에 수험생 예비 소집을 했는데, 고사장 운동장에서 출석 확인을 하는 게 감독관의 임무였다. 마이크로 전체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동안..

길위의단상 2020.11.16

한 장의 사진(26)

학교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남은 술과 안주를 미리 숙직실에 챙겨 두었다. 내가 숙직하는 날이었고, 술꾼들은 자연스레 숙직실로 모였다. 그때는 남교사가 돌아가며 학교를 지키는 숙직을 했다. 여교사가 많은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씩 차례가 돌아왔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야간 순찰은 학교에서 고용한 아저씨가 돌기 때문에 전화나 받고 자리만 지키는 정도였다. 결혼한 사람은 불편하게 여겼지만, 총각은 오히려 숙직을 좋아했다. 집에 갔다 왔다 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자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숙직을 하면 술판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서 한잔 걸치고는 술을 사 가지고 숙직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취해서 흥이 나면 교무실에 들어가 앰프함을 열고 회의할 때 사용하는 마이크로 노래자랑도 했다. 원조..

길위의단상 2020.11.10

상처 입은 천사

핀란드 화가인 휴고 게르하르트 심베리(H. G. Simberg, 1873~1917)가 그린 '상처 입은 천사(Wounded Angel)'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은 20년 전쯤 현직에 있을 때 전교조에서 펴낸 소책자에서였다. 당시는 청소년 자살이 사회문제로 대두했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였다. 이 그림은 우리 교육 현실을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지금도 무척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림의 분위기는 어둡고 황량하다. 땅에는 나무 한 그루와 꽃 몇 송이가 피어 있을 뿐 황무지와 비슷하다. 먼 산이나 호수도 회색이다. 무엇에 다쳤는지 상처 입은 천사가 들것에 실려 간다. 천사의 눈은 가려져 있다. 천사를 나르는 둘 중 뒤에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

길위의단상 2020.11.07

학교가 가르치지 않는 것

교육 현장에 있을 때 자괴감이 컸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 엄청난 벽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임을 안 맡거나 보충수업을 거부하는 등 나는 고작 소극적 저항만 할 수 있었다. 고백하건대 아이들을 신나게 가르쳐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도권 교육에 실망한 일부 학부모는 대안학교를 택하기도 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은 눈을 감고 실상을 외면한다.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현실을 수용하고 체념한다. 잘못된 길이란 걸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실은 비극이다. 세계에는 우리와 다른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는 나라도 많다. 유럽의 교육 제도, 그중에서도 독일의 교육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청소년 우울증과 자살률 1위의 지옥 나라가 ..

길위의단상 2020.10.28

마음대로 안 된다

어쩌다 보니 모임 세 개가 한 날에 겹쳤다. 그동안 코로나 핑계를 대고 모임에는 거의 안 나갔는데, 슬슬 움직여 보려니까 한꺼번에 몰리는 행운인지 불상사인지 모를 일이 일어났다. 고민하다가 결국은 설악산에 단풍 보러 가는 모임을 점 찍었다. 단풍은 때가 있는지라 이번에 안 가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십이선녀탕 단풍은 처음이기에 기대가 컸다. 그런데 호사다마일까, 에너지를 보충할 겸 전날 저녁에 고기를 구워 포식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소화를 시키지도 않은 채 누운 게 화근이 된 것 같았다.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아침이 되니 속은 비었는데도 밥 한술 뜰 수 없었다. 설악산이고 뭐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둘째에게..

길위의단상 2020.10.16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M 중학교에 근무할 때였으니 1980년대 초반이었다. 일과가 끝나고 퇴근하는 길에는 그냥 집으로 가는 날이 드물었다. 학교 앞에 있는 동그랑땡 집에서 소주를 적당히 마신 뒤, 대개 입가심으로 한 잔 더 하자면서 호프집으로 가는 게 정해진 코스였다. 호프집 안주는 보통 노가리와 마른안주였다. 그날은 교감이 동행했고 역시 순서대로 이차 호프집에 자리를 잡았다. 교감은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해서 M 중학교에 부임해 왔다. 교감과 함께 있으면 술자리의 화제는 자연히 일본 얘기가 많았다. 교감은 일본으로부터는 배울 게 많다는 걸 늘 강조하는 지일파였고, 일본에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그날은 일본 문화 얘기를 하다가 흥이 났는지 일본 노래를 불렀다. 당신이 일제 강점기 때 학교에서 배웠던 노래로 ..

길위의단상 2020.09.18

금란교회의 추억

금란교회 하면 개신교 신자든 비신자든 한 번은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등록된 교인 수가 14만 명이 되는 감리교회 중에서는 세계 최대의 교회다. 또, 워낙 유명세를 탄 김홍도 목사가 시무한 교회로 보수 반공 이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지난 2일에 김홍도 목사가 별세했는데, 전광훈을 길러낸 스승이었다는 보도가 지면에 실렸다. 나도 금란교회와 김홍도 목사와의 짧은 인연이 있으므로, 그분의 부고에 잠시 숙연해지며 거의 50년 전 옛일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나는 1970년대 초중반에 금란교회 신자였다. 1972년, 대학교 2학년생일 때 금란교회에 처음 나갔다. 같은 과 친구가 소개해 주면서 담임목사의 영적 능력이 굉장하다고 말했다. 그때는 김홍도 목사가 금란교회에 막 부임했을 때였다. 처음 교회를 나가..

길위의단상 2020.09.06

친일과 대한민국

친구가 카톡으로 긴 글을 보내 주었다. 글쓴이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최진석 선생이다. 전에 EBS를 통해 선생의 노자 강의를 감명 깊게 들었던 적이 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념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 상황을 보는 것 같다. 성숙한 대한민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한 번은 견뎌내야 할 통과의례인지 모른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언젠가는 발목을 잡는다. 친일과 반일에 관련된 논란도 그중 하나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독단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많지만 선생의 견해 역시 경청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가을호에 실린 따끈따끈한 글이다. 친일과 대한민국 / 최진석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꿈꾸는 나는 작년 7월에 발표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

길위의단상 2020.09.01

시무7조 상소와 하교문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시무(時務)7조 상소문'이 화제다. 글쓴이는 진인(塵人) 조은산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필력을 갖춘 분이 아닌가 싶다. 이분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글재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 글을 옮겨 적다 보니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이 무척 아쉽다는 걸 느낀다. 보수의 첫째 가치는 공동체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민족을 경시하고 사리 추구와 외세 의존이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다. 일부 극우의 사상이 점점 확산하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분 글의 오독인 줄 모르지만, 내 가진 것을 앗기기 싫다는 혜택받은 자의 억지투정으로 읽힌다. 사악하다고까지는 차마 말하지 않겠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양극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길위의단상 2020.08.30

태풍 바비

태풍 바비(Bavi, 8.22~8.27)가 지나갔다.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는데 다행히 큰 피해 없이 통과했다. 기상청에서는 역대급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이번에도 기상청의 과장 예보가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 태풍만이 아니라 기상청 예보가 지나치게 오버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게 반복되면 기상청은 양치기 소년이 될 수밖에 없다. 조심하라고 외쳐도 국민은 별로 안 믿게 된다. 기상청은 과학이다. 오직 데이터로 말해야 한다. 예측이 잘못되어 욕을 먹더라도 사실대로 전하는 게 옳다. 기상청은 이번 태풍의 크기 예측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했다. 폭풍반경을 보면 거의 배 가까이나 틀렸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가 봐도 바비는 그렇게 덩치가 큰 태풍이 아니었다. 수도권에서는 출근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는데 막상 태풍..

길위의단상 2020.08.28

질긴 장마

2020년은 코로나와 함께 질긴 장마의 해로 기록될 것 같다. 중부 지방의 장마는 어제 8월 16일에야 끝났다. 6월 24일부터였으니 무려 54일간 지속한 최장기간 장마였다. 그전 기록은 2013년의 49일이었다(6.17~8.5). 또한 장마가 가장 늦게 끝난 해로 기록이 남게 됐다. 1987년 장마가 8월 10일에 끝났는데, 그때보다 무려 6일이나 더 오래 끌었다. 특히 7월 하순부터 장마 끝날 때까지는 거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내리 비가 내렸다. 땡볕 더위는 피했지만 후덥지근한 습도 높은 날씨 역시 견디기 힘들었다. 올 장마의 전국 누적 강수량은 920mm로 역대 두 번째 기록이었다. 질긴 장마와 비로 인한 피해도 컸다. 마치 전염병과 기상 이변은 연관되어 있다는 걸 하늘이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길위의단상 2020.08.17

생각하는 재미

바둑만큼 생각하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놀이도 없다. 내가 바둑을 즐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생각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수칙은 바둑에도 예외가 아니다. 어려운 장면을 만나서 장고를 하면 빨리 두라고 채근하거나, 심하면 짜증을 낸다. 같이 느긋하게 바둑을 둘 수 있는 상대를 만나기 어렵다. 요사이는 거리에서 기원을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인터넷 바둑이 대세다. 인터넷 바둑의 특징은 속전속결이다. 대부분 제한시간이 5분, 아니면 10분이다. 이 정도면 금방 제한시간이 지나가고 바로 10초 초읽기에 들어간다. 10초에 한 수씩 두는 것은 나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시간에 쫓기며 허둥대다 끝난다. 속기 바둑은 실력보다는 순발력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길위의단상 2020.08.09

책 읽는 소리

나는 할아버지로부터 유별난 사랑을 받았다. 그 시절에 일흔이 되어서 첫 손자를 봤으니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이 오죽했겠는가. 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버릇없이 자랐다 해도 할 말이 없다. 할아버지 수염을 잡고 "이랴 이랴" 하면, 할아버지는 엉금엉금 기면서 내가 끄는 대로 따라다니셨다. 수염이 뽑혀도 그저 좋아라 하시며, 손자를 위해서라면 어떤 악역이라도 마다치 않으셨다. 동네 사람들이 희한한 구경거리가 났다고 모여들었다 한다. 사랑방에는 동네 할아버지들이 자주 놀러 오셨다.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깨우쳤을 때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으로 나를 부르시고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또래보다 앞서 글자를 익힌 손자를 자랑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동갑내기보다 나는 먼저 학교에..

길위의단상 2020.07.30

서울 집값

노무현 정권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진보 정권을 자칭하는 무리가 집권하면 부동산이 한바탕 춤을 춘다. 전국적인 현상은 아니고 주로 서울에 국한되지만, 서민을 위하겠다는 정부가 서민의 가슴에 허탈과 좌절의 대못을 박고 있다. 도대체 문재인 정권이 집값을 잡을 의지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집값을 잡겠다는 시늉만 하는 것 같아 더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청와대 참모부터 다주택을 처분하겠다고 한 약속이 언젠데 아직도 눈치만 보고 있다. 그러다가 다급해지니 무슨 수석이라는 자는 두 채 중 강남 집은 그대로 두고 지방에 있는 집을 팔겠다고 한다. 눈속임도 격이 있어야지, 이런 질 낮은 코미디는 없다. 구중궁궐에 있는 몇 명이서 집이 한 채니 열 채니 싸우지 말고 정책이나 제대로 세워라. 국민은 속으로 비아냥거린다..

길위의단상 2020.07.06

해 뜨는 집

고등학교에 다닐 때 토요일 4교시는 HR이었다. HR은 'Home Room'의 약자로 글자 뜻과는 상관없이 학급 회의를 하는 시간이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로 시작하면서 회의 절차는 따랐으나 거의 형식적이었다. 회의 내용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는 아이가 없었다. 발언도 거의 농담 따먹기 식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회의를 시작하는 것만 보다가 교무실로 내려가셨다. 그러면 반장은 적당히 회의를 마무리하고 칠판에 'Home Room' 대신 큼지막하게 'Happy Recreation'이라 바꿔 적곤 했다.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2학년 때 반장이었던 Y는 오락부장을 겸했는데 학교 생활을 즐겁게 하자는 주의였으므로 아이들한테 인기가 있었다. 'Home Room'에서 'Happy Recreation'으로..

길위의단상 2020.06.23

여기 있는 게 좋아

텃밭을 부치는 이웃이 세 집이나 있다. 덕분에 야채는 떨어지지 않고 얻어먹는다. 연초에 아내가 우리도 텃밭을 하나 해 볼까, 라고 했는데 나는 거절했다. 여기는 조건이 좋다. 집 가까이에 노는 땅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경계를 긋고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작물 가꾸는 것도 시들해졌다. 귀찮기도 하고 무엇에 매인다는 게 싫다. 대신 이웃이 부치는 텃밭은 가끔 들린다. 오늘 오후에 텃밭에 나가는 이웃을 따라나섰다. 방 한 칸 정도 되는 넓이의 땅뙈기에는 상추, 배추, 쑥갓, 완두콩, 고추, 딸기가 심겨 있다. 주변에는 고만고만한 텃밭들이 있고, 가끔 밭에 나와 있는 다른 사람과도 만난다. 오늘은 할머니 한 분이 옆에서 일하고 계셨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이웃분은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었다. "할머니..

길위의단상 2020.06.13

두 견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공평무사한 입장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본다. 누구나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과 현상을 본다. 심하게 말하면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객관적이면서 공평한 잣대는 없다. 컵이라는 실체가 있지만 보는 각도에 따라 사각형으로 보이기도 하고 둥글게 보이기도 한다. 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컵을 둥글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사각형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중의 하나다. 작금의 윤미향 사태를 보면서 솔직히 뭐가 뭔지 헷갈린다. 보도를 보면 윤미향은 시민운동을 가장한 사기꾼 같아 보이다가도, 다른 편 말을 들어보면 의혹 제기가 마녀사냥식으로 너무 지나친 것 같다. 만약 사실이 왜곡되어 있다면 당사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검찰 수사가 들어갔으니 내가 여기서 왈가..

길위의단상 2020.06.10

낮에 나온 반달

오후에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반달이 떠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원 모양의 달이 또렷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중학교에서 물상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태양과 달의 운동 단원이었던 것 같다. 한 아이가 질문했다. "선생님, 달은 낮에 볼 수 없나요?"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럼 볼 수 없지. 낮에 달이 떠 있어도 하늘이 너무 밝기 때문에 달은 안 보이는 거란다." 이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걸 몇 년이 지나서야 눈치챘다. 명색이 과학을 전공한 선생이 낮에 뜬 달을 본 적이 없었다니. 아니, 봤더라도 그러려니 했지 앎과 연결되지는 않았다. 낮에는 해, 밤에는 달이라는..

길위의단상 2020.05.31

지적 생명체 실험 실패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실제 주인은 유전자다. 유전자가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 지적 존재인 인간을 이용할 뿐이다. 처음부터 지적 존재가 되도록 계획하고 유도한 주체는 유전자다. 인간은 오로지 '유전자 기계'에 불과하며, 유전자의 이기성이 제일 잘 발현된 존재가 호모 사피엔스다. 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내용이다. 지구는 살아 있다. 지구는 토양과 대기, 해양과 생물 생태계를 포함해서 조화롭게 작동하는 신성하고 지성적인 존재다. 지구는 유기체처럼 스스로 진화하고 발전해 나간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 무기물은 생존에 적합한 방향으로 지구의 상태를 조절 유지해 왔다. 만약 지구 시스템을 파괴하는 요인이 생기면 지구는 그를 제거할 것이다. '가이아 이론'이다. 두 이론이 상충하는 듯 보이지만 지구의 위기 상황이..

길위의단상 2020.05.16

낮술

낮술 맛을 알게 된 건 퇴직하고 난 뒤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낮술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술은 퇴근한 뒤 저녁에 마시는 거였다. 여러 사람이 모여 왁자지껄한 가운데 직장 얘기를 안주 삼아 스트레스를 푸는 게 대부분이었다. 술맛을 음미하기에 적당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퇴직하고 나니 낮이 제일 한가한 시간이 되었다. 심심하다 보니 반주로 몇 잔 홀짝이게 된다. 집에서 마시는 낮술이 직장 다닐 때와 다른 점은 시간상의 차이와 함께 대작하는 사람의 유무다. 대개 혼자이고 가끔 아내가 앞에 앉기도 한다. 집에서 마시는 낮술은 조용한 가운데 술맛을 느끼면서 취해가는 과정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내 낮술을 방해하는 것은 바깥에 있지 않다. 기분 좋다고 연달아 낮술을 즐기다가는 이내 위..

길위의단상 2020.04.21

짜릿한 개표 방송

어제 실시한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다. 전국 253개 지역구에서 민주당이 163석, 통합당이 84석, 정의당이 1석, 무소속이 5석을 얻었다. 민주당의 압승, 통합당의 참패다. 어느 선거나 결과가 조마조마하지만 이번 총선은 유례없는 진영 대결이 벌어져 더 흥미로웠다. 선거에서는 국민이 심판관이다. 이번 총선은 국민이 확실하게 민주당 손을 들어줬다. 통합당의 정치 행태에 환멸을 느낀 국민이 많았다는 얘기다. 민심이 어떠한지 통합당은 잘 성찰해야 할 것이다. 제발 우리나라 정치도 한 단계 더 성숙해졌으면 좋겠다. 막말을 일삼는 정치인도 사라져야 한다. 이번에 그런 의원들 대부분이 낙선한 건 다행한 일이다. 이래서는 표를 못 받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줬다고 생각한다. 21대 국회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

길위의단상 2020.04.16

희망사항

보통 진보와 보수를 나눌 때 민주당은 진보, 통합당은 보수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내 기준으로는 민주당이나 통합당이나 모두 보수다. 민주당은 약간 진보적 색채를 띤 보수당이고, 통합당은 오른쪽으로 치우친 보수당이다. 진보라고 하면 정의당이나 녹색당, 민중당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이나 통합당은 기득권층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민주당보다는 통합당이 훨씬 심하지만, 통합당과 다르다고 민주당을 진보라고 하기는 어렵다. 재벌이나 부동산을 대하는 엉거주춤한 자세, 특히 성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보면 그렇다. 진보라면 사회가 다소 혼란을 겪더라도 복지나 평등, 정의의 문제에서 원칙을 견지하고 적극적으로 싸워야 한다. 말이나 구호만이 아니라 정치인이 살아가는 삶의 방향도 마땅..

길위의단상 2020.04.13

머스크의 테러

어느 분이 얼마 전에 찍은 별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사진 가운데로 낙서를 한 것처럼 흰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분의 설명으로는 머스크의 스페이스X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 여러 대가 열을 지어 이동한 흔적이라고 했다. 사진을 못 쓰게 만들었으니 그분 입장에서는 '머스크의 테러'라고 부를 만했다. 일론 머스크(Elon Musk)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야심을 가진 사업가다. 그가 꿈꾸며 실행하는 스케일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 불허다. 그중 하나에 '스타링크 프로젝트(Starlink Project)'가 있다. 인공위성으로 세계 전역을 인터넷으로 연결하겠다는 프로젝트다. 2027년까지 지상 550km의 우주 궤도에 인공위성 12,000개를 올려서 사막이나 극지방 등 지구 어디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초고속 인터..

길위의단상 2020.03.30

정릉의 추억

고3이 되면서 정릉으로 이사를 했다. 돈암동에서 살던 단칸방이 비좁은 데다 골목에 붙어 있어 시끄러웠기 때문이다. 공부에 집중할 시기에 조용한 환경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구한 방은 정릉에 있었다. 도봉산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로 가까이에 '청수장'이 있었고, 서울이지만 시골 분위기가 나는 마을이었다. 전에 살던 데에 비하면 이사한 집은 대궐이었다. 터가 엄청 넓었고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다. 집 뒤가 바로 도봉산 자락이었다. 외할머니와 내가 살 방은 별채로 되어 있어 주인집과 떨어져 있었다. 세를 주기 위해 최근에 지었다고 했다. 방이 넓었고 무엇보다 완벽하게 조용했다. 비록 셋방이었지만 부자가 된 것 같았다. 다만 학교와의 거리가 멀어 버스를 30분 이상 타고 가야 했다. 다행히 ..

길위의단상 2020.03.21

텅 비었다

하필 이 시국에 이빨이 고장 났다. 진통제로 버티지만 머리까지 욱신거리며 아프다. 코로나19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 이상이 나타난 건 서너 달 전이었다. 딱딱한 걸 씹으면 통증이 오는 정도였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전에 다른 이빨도 그런 식으로 몇 달 참았더니 증상이 사라졌다. 이번에도 병원에 가지 않은 채 나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웬걸, 나흘 전에 갑자기 통증이 찾아왔다. 아프면 어느 부위나 고통을 주지만 치통도 만만치 않다. 심해졌다 약해졌다 주기적으로 괴롭힌다. 죽으로 연명하면서 음식물 온도도 잘 맞춰야 한다. 조금만 뜨겁거나 차가워도 안 된다. 인상 쓰면서 밥을 먹어야 하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단골 치과는 상가 건물 3..

길위의단상 2020.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