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14

속물들의 세상

세상이 변하면서 사람들이 쓰는 말도 달라진다. 새로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옛날에는 자주 썼는데 지금은 빈도가 확 떨어진 말들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속물'이다. 전에는 "속물 같은 놈"이라고 흔히 말했는데 요즘은 좀체 듣기 어렵다. 과연 속물이 줄어들어서 그런 걸까? 속물(俗物)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교양이 없으며 식견이 좁고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에만 마음이 급급한 사람을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 되어 있다. 속물근성(俗物根性)이라는 말도 있는데 '금전이나 명예를 제일로 치고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는 생각이나 성질'이다. 속인(俗人)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지만 인(人) 대신 물(物)이 붙으면 한마디로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속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모욕을 느낄 만하다...

참살이의꿈 2024.08.21

두 가지를 경계한다

늙어지면서 두 가지를 경계한다. 하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어가는 것이다. 노화는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이 퇴화하는 과정이다. 하늘로부터 받고 누린 것을 하나하나 돌려줘야 한다. 상실이 순리라고 할지라도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나는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 가슴이 뛰는가. 어린 손주의 해맑은 웃음, 왕성한 호기심,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동시에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자각케 한다. 워즈워스는 무지개를 보며 노래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마찬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무지개'는 자연에 대한 감성과 경이감일 것이다. 어린..

참살이의꿈 2022.09.11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 서시 / 이정록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 하나의 몸만 성하면 다행이다, 행복하다, 라고 안도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뒷산의 나무까지 보듬을 줄 아는 이 갸륵한 심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시선을 확장해 보면 안다. 나의 안락은 타자의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내 몸의 성함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살필 때 나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읽는기쁨 2022.08.31

70줄에 들어서면

공식적으로는 65세부터 노인이 된다. 내 경우에는 경노카드를 발급받을 때 벌써 노인이 되었나, 라는 씁쓰레한 심정이 앞섰다. 65세는 몸이나 마음이나 노인이라는 실감이 별로 나지 않는다. 그러나 70줄에 들어서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이 앞에 '6'자가 붙는 것과 '7'자가 붙는 것은 천양지차다. 우선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아무리 고령사회라지만 일흔이라는 나이의 무게감은 만만치 않다. 신체나 정신도 전과 확연히 다르다. 나이 70은 본격적인 노화가 시작되는 인생의 분기점이다. 능동적인 생활 주체가 수동적인 약자로 변하는 시기다. 우리보다 일찍 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경우를 보면 70줄에 들어서면 질병을 앓을 확률이 높아지면서 대부분이 병에 시달린다고 한다. 사망할 때까지 고령자의 약 10% 정도만 심신이..

참살이의꿈 2022.08.29

노년에 경계할 것

감이 익어 홍시가 되듯 사람은 나이가 먹는다고 저절로 성숙해지지 않는다. 늙으면 바람 불듯 물 흐르듯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가당찮은 생각이다. 잘 익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 노년에 들어서고 보니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이 자기 독단에 빠지는 일이다. 노인은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잘못하면 자신의 경험을 과대 해석하는 착각에 빠진다. 특히 하나의 전문 분야에 평생을 보낸 사람일수록 이런 성향이 강하다. 지극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자신의 기준이나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게 버릇이 된 사람을 흔하게 본다. 이런 사람은 대체로 목소리가 크고 모임을 주도한다. 동조하고 따르는 사람도 많다. 자기 생각이나 믿음이 옳다고 확신하므로 남을 가르치려 하고 자신의 지식을 과시한다. 이런 함정에 빠지면 ..

참살이의꿈 2021.03.01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를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시읽는기쁨 2017.12.17

더 살아봐야 돼

10여 년 전쯤 주변 상황이 무척 힘들 때였다. 벌여놓은 일이 걸림돌이 되어 모든 것이 꼬이기만 했다. 한 친구가 여주로 찾아왔다. 친구가 내 사정을 자세히 알 리는 없었다. 저녁을 같이 먹으며 친구는 자기 집의 행복을 자랑했다. 부모님이 이웃에 덕을 베풀며 살기 때문에 자신들이 복을 받고 있다는 말이었다. 친구네 집은 우리보다 훨씬 더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걱정거리가 적은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비교되는 처지에서는 심사가 편안치 않았다. 덕에 반드시 어떤 보상이 따라온다는 논리는 단순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현실은 오히려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선행하는 행위와 인과관계로 연결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복잡하다. 우리가 덕으로 생각하는 것이..

참살이의꿈 2017.08.14

누가 듣는다

입주해서부터 신경을 쓰게 하는 게 윗집 소음이다. 밤 12시가 넘도록 잠을 못 들게 되면 부처님이 아닌 한 울화가 치미는 걸 어찌할 수 없다. 그나마 이젠 많이 적응되었고, 윗집 아이들도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니 소음도 많이 줄어들었다. 몇 주간 평화가 찾아오기도 한다. 신경 쓰지 않고 편안히 잠을 잔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실감한다. 그런 어느 날 기뻐서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요사이는 윗집이 조용하지? 참 고마운 사람들이야.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 웬걸 바로 그날 밤에 천정에서는 전쟁이 터졌다.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며 내 가벼운 입방정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과학적으로는 그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는 옛말이 허투루 생긴 것도 아닐 것이다. 돌아보면 자신 있..

참살이의꿈 2015.11.08

논어[153]

선생님 말씀하시다. "내게 지식이 있단 말인가? 지식은 없다. 그러나 하찮은 사람이 내게 시시한 것을 묻더라도 나는 전후를 살펴 극진히 일러주지."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 子罕 7 공자를 자신을 무지(無知)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겸양으로만 볼 수 없다. 지식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이런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뉴턴이 자신을 바닷가에서 뛰노는 어린아이에 비유한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뒷부분이다. 하찮은 사람이 시시한 것을 물어도 전후를 살펴 극진히 일러준다는 데 공자의 위대함이 있다. 다른 천재들과 비교되는 것으로 공자의 겸허한 인품이 드러난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지하다는 걸 자각하기 때문에 가능한 태도다. 알수록 무지가 드러나고 겸손해진다...

삶의나침반 2015.07.30

운칠기삼

운동이나 바둑 등 승부가 걸린 경기에서는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서로 비슷한 수준일 때는 실력차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지 않는다. 이기고 지는 게 실력보다는 운에 더 좌우된다. 야구 시합을 보아도 잘 때린 공이 야수 정면으로 날아가 더블아웃 당하기도 하고, 빗맞은 공은 행운의 안타가 되기도 한다. 작은 변수 하나가 시합을 뒤흔드는 것이다. 그래서 5전3승제, 또는 7전4승제처럼 여러 경기를 치러서 우연의 요소가 개입할 여지를 줄인다. 인생살이는 더 복잡하고 우연의 요소가 많다. 우연히 일어난 작은 사건 하나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 짓고 생사를 가름하기도 한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도 어떤 사람은 출항이 늦어지니까 비행기로 간다고 배에서 내렸다. 순간의 선택으로 생명을 구했다. 버스 사고가..

참살이의꿈 2014.06.19

논어[84]

선생님 말씀하시다. "맹지반은 뽐내지 않는다. 도망칠 때 뒷처리를 맡고, 성문으로 들어와서는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말하기를 '뒷처지자고 해서 처진 것이 아니라, 요놈의 망아지가 달려 주어야지!'라고 하였다." 子曰 孟之反不伐 奔而殿 將入門 策其馬 曰 非敢後也 馬不進也 - 雍也 10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는 맹지반(孟之反)의 행동이다. 맹지반은 후퇴하는 군대의 뒤를 맡아 아군을 안전하게 성 안으로 들여보낸 후 제일 늦게 돌아왔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일부러 뒤처진 것이 아니라 말이 달려주지 않아서 그랬단다. 자신의 용맹과 희생정신을 자랑할 만도 하건만, 말에게 핑계를 대며 먼저 도망간 사람들을 미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배려와 겸양의 마음씨가 가상하다. 반면에 세월호 선장 같은 행동도 있다. 그는 혼자 살기 ..

삶의나침반 2014.05.24

논어[61]

선생님이 칠조개를 벼슬 살게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저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기뻐하였다. 子使 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 公冶長 3 칠조개에게 벼슬자리를 주었더니 칠조개는 자신이 없다며 사양한다. 이를 보고 공자가 기뻐했다는 기록이다. 앞 절과 합쳐서 보면 공자가 칭찬하는 사람 윤곽이 나온다. 과묵하고 겸손한 사람이다. 비단 공자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나 이런 사람은 신뢰를 받는다. 큰 인물이라면 마땅히 이런 인품을 갖춰야 한다. 스승으로부터 좋은 직장을 소개받았는데,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인품이라면 공자도 기뻐했을 게 틀림없다. 공자는 사람됨을 보기 때문이다.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잘 꾸며 상품성을 높여야 하는 현대에서 칠조개 같은 사람은 버텨내기 힘들 ..

삶의나침반 2013.12.23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만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지난봄 단임골에 갔을 때였다. 꽃순이와 나무꾼은 노래를 부르고는 꼭 “배꼽인사” 라고 말하면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인사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 인상적이었다. 두 손을 공손하게 배..

시읽는기쁨 2010.11.26

觀海難水

맹자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孔子登東山而小魯登太山而小天下 故觀於海者難爲水遊於聖人之門者難爲言 '공자는 동산에 올라서 노나라가 작다는 것을 알았고, 태산에 올라서는 천하가 작다고 느꼈다. 그러므로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노니는 사람에게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관해난수(觀海難水)란'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우물 안이 온 세상인 줄 안다. 그래서 쉽게 물을 말하고 세상을 말한다. 그러나 바다를 본 개구리는 할 말을 잊는다. 큰 것을 깨달은 사람은 무엇이든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법이다. '觀海難水'를 책상 위에 써붙이고 내 자경의 문구로 삼는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태산도 동산도 아닌 집 뒤의 작은 언..

참살이의꿈 2007.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