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11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 권정생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가 그렇게 살다 가시는 걸까 한평생 기다리시며 외로우시며 안타깝게.... 배고프셨던 어머니 추우셨던 어머니 고되게 일만 하신 어머니 진눈깨비 내리던 들판 산고갯길 바람도 드세게 휘몰아치던 한평생 그렇게 어머니는 영원히 가셨다 먼 곳 이승에다 아들 딸 모두 흩어 두고 가셨다 버들고리짝에 하얀 은비녀 든 무명 주머니도 그냥 두시고 기워서 접어 두신 버선도 신지 않으시고 어머니는 혼자 훌훌 가셨다 어머니 가실 때 은하수 강물을 얼지 않았을까 차가워서 어떻게 어머니는 강물을 건너셨을까 어머니 가신 거기엔 눈이 내리지 않는 걸까 찬바람도 씽씽 불지 않는 걸까 어머니는 강 건너 어디쯤에 사실까 거기서도 봄이면 진달래꽃 필까 앞산 가득 뒷산 가득 빨갛게 빨갛게 진달래꽃 필까 어머니 사시는 집은 초..

시읽는기쁨 2019.06.08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 선생과 권정생 선생이 생전에 주고받은 편지 모음집이다. 1973년에 만난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다. 당시 이 선생은 마흔아홉, 권 선생은 서른일곱이었다. 아동문학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분은 인생의 도반이 되어 사귀었다. 1976년 5월 31일 권 선생의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혹시 만나 뵐까 싶어 버스 정류소에서 서성거려 보았습니다." 숨어 살던 권 선생을 세상에 알린 분이 이오덕 선생이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격려하고, 책 출판을 도와주었다. 권정생 선생이 평생을 병고에 시달린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편지를 보니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상상 이상이었다. 아마 편지에서도 이 선생이 염려할까 봐 제대로 밝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목숨을 걸고 썼다는 말이 맞을 것 ..

읽고본느낌 2017.10.10

강냉이 / 권정생

집 모퉁이 토담 밑에 한 페기 두 페기 세 페기 생야는 구덩이 파고 난 강낭알 뗏구고 어맨 흙 덮고 한 치 크면 거름 주고 두 치 크면 오줌 주고 인진 내 키만춤 컸다 "요건 내 강낭" 손가락으로 꼭 점찍어 놓고 열하고 한 밤 자고 나서 우린 봇다리 싸둘업고 창창 길 떠나 피난 갔다 모통이 강낭은 저꺼짐 두고 "어여-" 어매캉 아배캉 난데 밤별 쳐다보며 고향 생각 하실 때만 내 혼차 모퉁이 저꺼짐 두고 왔빈 강낭 생각 했다 '인지쯤 샘지 나고 알이 밸 낀데....' - 강냉이 /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생이 쓰신 여러 편의 동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출간된 것이 라는 동시집이다. 2011년이었다. 이 시는 선생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썼다고 밝힌 바 있다. 선생의 문학적 재능을 ..

시읽는기쁨 2017.09.22

몽실 언니

초판이 1984년에 나왔으니 30년이 넘었다. 그 뒤에 TV 드라마로 방영되어 인기를 얻었다. 아마 '몽실 언니'라는 인지도는 드라마 덕분일 것이다. 그 드라마를 꾸준히 본 것 같지는 않고, 까만 치마와 흰 저고리의 몽실이 이미지는 아직 남아 있다. 권정생 선생의 의 감동이 커서 연이어 도 읽어 보았다. 시대의 격랑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우리 민중의 이야기지만 시대 배경이나 주인공의 연령대가 다르다. 무엇보다 는 소년소설로 동화에 속한다. 그러나 그 시대를 체험한 어른들에게 더 공감을 줄 것 같다. 책을 읽어보니 선생이 에서 말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겠다. 책의 머리말에도 분명히 나온다. "이 세상의 모든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누구나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은 인간을..

읽고본느낌 2017.09.18

한티재 하늘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가슴이 멨고 눈물이 흘렀다. 권정생 선생이 어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서럽고 고달팠던 우리네 백성들 삶의 이야기다. 먼 옛날도 아니다. 불과 100년 전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외할머니가 떠올라서 더욱 그랬다. 외할머니의 일생 역시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 중 하나와 다르지 않았다. 청상과부가 된 뒤 새끼와 외손주를 키우느라 어느 곳 하나 뿌리 내리지 못하고 전전하며 사셨다. 그나마 배를 곯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다. 은 권정생 선생이 쓰신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이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경북의 안동과 영양 지역이 무대다. 이리저리 짓밟힌 우리 선조들의 서러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느낌을 전할 수는 없다. 직접 읽어봐야 한다. 그런데 내용이 완결되지 않은..

읽고본느낌 2017.09.10

[펌] 청년 전쟁

이오덕 선생의 옛글 여느 구석엔 권정생 선생과 조우한 순간이 적혀 있다. ‘너무나도 훌륭한 젊은 동화작가를 발견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 결과적으로 권정생은 이오덕보다 몇 해를 더 살았다. 하지만 평생 온몸에 퍼진 결핵과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하루 30분도 앉아 일하기 어려운 날이 많았지만, 한결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누구보다 맑고 강렬하게 사유했다.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언젠가 그의 안동집에서 한담을 나누던 그가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까 뱀이 방에 들어왔어요.” “마당의 잡초를 그냥 두시니까 뱀이란 놈이 방 안과 밖을 구분 못한 모양이군요. 그런데 독사면 어쩌시려고요.” “독사는 방에 안 들어와요.” “그런가요.” 다녀와 그쪽 전문가에게 물었더..

참살이의꿈 2015.08.14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 연인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 애국자가 없는 세상 / 권정생 김연아 선수가 소치 올림픽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녀의 마지막 무대는 존 레논의 '이매진'을 배경 음악으로 한 갈라쇼였다. '이매진'은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가진 ..

시읽는기쁨 2014.03.06

밭 한 뙈기 /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밭 한 뙈기 / 권정생 아파보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내 능력이나 재주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다른 것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내 소유물임을 나타내는 증서는 일종의 차용증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제 자리로 돌아간다는데 아쉬울 것 없어야한다. 내 것이라고 우기니 욕심도 생기고 속도 끓이게 되는 것이다...

시읽는기쁨 2009.12.17

권정생 선생의 유언장

권정생 선생의 2주기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권정생 선생과는일면식도 없었지만 그분의 특별한 삶으로 인해 내 가슴에 늘 살아계신다. 권 선생과는 생전에 한 번 뵈올 수도 있었다. 권 선생과 잘 아는 사이인 M이 언제 같이 한 번 찾아뵙자고 했는데 감히 내가 그분을 어떻게 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때 염치 불구하고 안동으로 내려갔었더라면 싶다. 자신의 생각대로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위대하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야 생각 따로 행동 따로다. 책장에는 온갖 무소유와 비움과 청빈에 대한 책이 가득하지만 삶은 그와 정반대다. 정신으로는 그런 척 하지만 몸은 물질의 단맛에 빠져 있다. 자신의 소유와 욕구를 버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그러나 권 선생은 일생을 그렇게 사셨다. 말하고 글 쓰..

참살이의꿈 2009.05.16

소 / 권정생

보리짚 깔고 보리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구리고 코로 숨쉬고 엄마 꿈꾼다 아버지 꿈꾼다 커다란 몸뚱이 굵다란 네 다리 - 아버지, 내 어깨가 이만치 튼튼해요 가슴 쫙 펴고 자랑하고 싶은데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는 보리짚 속에서 잠이 깨면 눈에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 소 / 권정생 선생은 죽는 날까지 오두막에서 병고와 친구하며 자발적 가난을 살았다. 이웃의 가난한 이들의 삶과 똑 같이 산 것이다. 10억이 넘는 그의 인세는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보내달라는 유언으로 남겨졌다. 이 맹렬한 자본주의의 시대에 다시 선생을 기억한다. '물물천(物物天)'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 만물이 하늘이고, 하느님의 얼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평생을 산속에서 석이(石耳)를 뜯으며 산 어..

시읽는기쁨 2007.09.18

글과 삶이 일치하셨던 분

평소 흠모해 왔던 권정생 선생님이 별세하셨다. '강아지똥' '몽실언니' 등을 쓴 동화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분의 삶이 더 진한 감동을 준다. 신문에도 '글과 삶이 일치했던 사람'이라는 소개가 실렸다. 그분의 책 중에서 특히 '우리들의 하느님'을 좋아하는데 자연과 생명, 가난한 이웃을 사랑했던 선생님의 얘기가 진솔하게 실려있다. 자신이 하는 말대로, 자신이 쓰는 글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말과 글이 화려할수록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의 실상을 보고는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진실되게 살려는 사람들의 근원적인 고민은 그런 데서 시작된다. 그나마 덜 위선적이 되려면아예 입을 닫는 수밖에 없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강단의 설교자들이야말로 가장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길위의단상 2007.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