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14

8월 / 김사인

긴 머리 가시내를 하나 뒤에 싣고 말이지야마하 150부다당 들이밟으며 쌍,탑동 바닷가나 한 바탕 내달렸으면 싶은 거지 용두암 포구쯤 잠깐 내려 저 퍼런 바다밑도 끝도 없이 철렁거리는 저 백치 같은 바다한테침이나 한번 카악 긁어 뱉어주고 말이지 다시 가시내를 싣고새로 난 해안도로 쪽으로부다당 부다다다당내리 꽂고 싶은 거지깡소주 나팔 불듯총알 같은 볕을 뚫고 말이지 쌍, - 8월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다른 시여서 깜짝 놀랐다. 늘 조곤조곤 속삭이듯 말하고 얌전해 보이는 시인의 내면에 이런 불 같은 열정과 일탈이 숨어 있다니, 의외였지만 솔직히 반가운 마음이 더 컸다. 나도 가끔씩 뭔가가 불끈 치솟아 오를 때가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궤도 이탈의 욕구 같은 것이다. '야마하 150'은 ..

시읽는기쁨 2024.08.25

딸년을 안고 / 김사인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에 냈나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 번만 들여다보아라. 부탁한다. - 딸년을 안고 / 김사인 선거철이라고 온갖 장밋빛 공약이 넘쳐난다. 국회의원 후보는 그렇다치고 대통령이라는 작자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개발 약속을 하면서 돈을 퍼주겠다고 난..

시읽는기쁨 2024.03.17

오누이 / 김사인

57번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길 여섯 살쯤 됐을까 계집아이 앞세우고 두어 살 더 먹었을 머스마 하나이 차에 타는데 꼬무락꼬무락 주머니 뒤져 버스표 두 장 내고 동생 손 끌어다 의자 등을 쥐어주고 저는 건드렁 손잡이에 겨우 매달린다 빈 자리 하나 나니 동생 데려다 앉히고 작은 것은 안으로 바싹 당겨 앉으며 '오빠 여기 앉아' 비운 자리 주먹으로 탕탕 때린다 '됐어' 오래비자리는 짐짓 퉁생이를 놓고 차가 급히 설 때마다 걱정스레 동생을 바라보는데 계집애는 앞 등받이 두 손으로 꼭 잡고 '나 잘하지' 하는 얼굴로 오래비 올려다본다 안 보는 척 보고 있자니 하, 그 모양 이뻐 어린 자식 버리고 간 채아무개 추도식에 가 술한테만 화풀이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멀쩡하던 눈에 그것들 보니 눈물 핑 돈다 - 오누이 / ..

시읽는기쁨 2023.01.16

공휴일 / 김사인

중랑교 난간에 비슬막히 식구들 세워놓고 사내 하나 사진을 찍는다 햇볕에 절어 얼굴 검고 히쭉히쭉 신바람 나 가족사진 찍는데 아이 들쳐업은 촌스러운 여편네는 생전 처음 일이 쑥스럽고 좋아서 발그란 얼굴을 어쩔 줄 모르는데 큰애는 엄마 곁에 붙어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차렷을 하고 눈만 때굴때굴 숨죽이고 섰는데 그 곁 난간 틈으로는 웬 코스모스도 하나 고개 뽑고 내다보는데 짐을 맡아들고 장모인지 시어미인지 오가는 사람들 저리 좀 비키라고 부산도 한데 - 공휴일 / 김사인 저 시절 중랑교가 무슨 볼품이 있었을까? 밑으로는 시커먼 중랑천이 흐르던, 높은 빌딩 하나 없는 서울 변두리였다. 그래도 서울 구경이라고 시골에서 올라온 한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는가 보다. 사진천국이 된 지금는 누구나 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

시읽는기쁨 2020.12.17

화양연화 / 김사인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짖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어디서 끈을 놓친 것일까. 아무도 우리를 맞당겨주지 않지 어느날부터. 누구도 빛나는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지. 눈멀고 귀먹은 시간이 곧 오리니 겨울 숲처럼 더는 아무것도 애닯지 않은 시간이 다가오리니 잘 가렴 눈물겨운 날들아. 작은 우산 속 어깨를 겯고 꽃장화 탕탕 물 장난 치며 슬픔 없는 나라로 너희는 가서 철모르는 오누인 듯 살아가거라. 아무도 모르게 살아가거라. - 화양연화(花樣年華) / 김사인 김사인 시인이 노래하는 '봄..

시읽는기쁨 2019.05.07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 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 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맨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 바짝 붙어서다 / 김사인 인간 세상에 가난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하다. 돈 많은 사람과 ..

시읽는기쁨 2018.01.24

이게 뭐야? / 김사인

가슴이 철렁한다. 눈치챈 건 아닐까, 내가 깡통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조차 잊고 언제부턴가 그냥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차를 타고 모르는 내색을 아무도 않지. 이게 뭐야? 여기 어디야? 아이가 물으면 집에 갈래, 울먹이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뜨거워지네. 이건 강아지 이건 나무 이건 칫솔 그렇게 일러줄까 허둥지둥 구파발이라고 우리나라라고 지구라고 하면 되나. 강아지가 뭐야, 지구가 뭐야, 다시 물으면? 무서워라 - 걱정 마, 좋은 데 가고 있어 - 다 와가, 가보면 알아 나도 잘 모른단다. 여기가 어딘지, 어떻게 왔는지, 저건 무언지 나도 실은 모른단다. 무서워서 입을 닫고 있단다. 내가 누군지도 사실은 모른다고 고백해버릴 것만 같네. 참아온 울음이 터질 것 같네. 그런 건 묻는 게 ..

시읽는기쁨 2017.11.15

보살 / 김사인

그냥 그 곁에만 있으믄 배도 안 고프고, 몇 날을 나도 힘도 안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하요. 그저 좋아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이 다 찌르르 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 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 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 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면,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져라우. 그 길로 죽어도 좋을 것 같어져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지났으면 혀라우. - 보살 / 김사인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오염된 세상에서 이런 건 뭐라 불러야 할까. 인간이 아가페의 흉내를 낸다면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시읽는기쁨 2016.08.16

다 공부지요

차례를 지내기 위해 지방을 쓸 때 '학생(學生)'이라는 글자에서는 늘 가슴이 뭉클해진다. 학사금이 없어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의 한이 생각나서다. 돌아가셔서야 '학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학생'이 벼슬을 하지 못한 망인에게 붙인다지만 의미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이름이다. 꼭 학교에서 배우는 게 공부가 아니다. 삶이 곧 공부인 것이다. '학생'이라는 말에는 인생을 배우는 과정으로 보는 유교의 관점이 들어 있다. 학(學)은 도(道)나 각(覺)보다 훨씬 친근하고 가깝다. 도나 각은 아무나 다다를 수 없다. 그러나 학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삶을 통해서 더 나은 인간으로 나아가는 노력이 학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살아서도 학생이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학교의 학생인 것이다.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

참살이의꿈 2016.04.17

좌탈 / 김사인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 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 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저녁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 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 좌탈(坐脫) / 김사인 이렇게 저세상으로 갈 수는 없을까? 동물의 죽음에서 성자의 모습을 본다. 인간계에서는 생사를 깨친 선승만이 좌탈입망(坐脫立亡) 할 수 있다고 한다. 요사이는 웰빙보다 웰다잉(well-d..

시읽는기쁨 2016.04.10

별사 / 김사인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면 나는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 하겠지요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인적 드문 소로길 스적스적 걸어 날이 저무는 일 비 오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으로 골똘히 서 있기도 하는 일 다 공부라고 하면 좀 낫지요마는 - 별사(別辭) / 김사인 신년시라고 꼭 희망과 꿈을 노래해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요. 보신각 앞에 모여 환호하고, 해돋이를 보기 위해 부..

시읽는기쁨 2014.01.01

아무도 모른다 /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내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

시읽는기쁨 2010.04.22

조용한 일 /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조용한 일 / 김사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는 나뭇잎이 아닌가 싶다. 너무나 흔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색깔이나 모양이 나뭇잎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류마다 잎의 모양이나 색깔이 다르고, 그 미묘한 차이가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잎의 부드러운 감촉도 좋고, 실핏줄 같은 잎맥도 예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나뭇잎의 춤은 또 어떤가. 가을 단풍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과 풍경을 연출한다. 나뭇잎은 나무에서 돋아나 평생을 나무를 위해 일하고, 나무의 성장을 돕는다. 물과 공기와 햇빛 만..

시읽는기쁨 2008.08.22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 김사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어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고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 속..

시읽는기쁨 2007.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