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7

어금니 깨물기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이다. 시인의 이름을 들으면 제일 먼저 이 떠오른다. 시인의 사전에서 단어들이 영롱하게 꽃 피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봤었다. 그 뒤로 을 읽어봤으니 정작 시보다 산문을 더 많이 접한 셈이었다. 시인의 예민한 감성의 촉수가 내 무딘 마음을 간지리는 책들이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자주 어금니를 깨물었다." 책 제목으로 쓰인 '어금니 깨물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 것 같다. 회복을 갈망해 온 울퉁불퉁한 시간들의 기록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책에는 치매를 앓으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타자를 향한 애틋한 마음씨가 요란하지 않으면서 따스하게 그려져 있는 글들이다. 책 표지에는 시인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다. "시인. 수없이 반복해서 지겹기도 했던 일들을 새로운 ..

읽고본느낌 2023.04.24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이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잠깐의 배웅이겠지만 불행히도 꿈은 아니라서 마..

시읽는기쁨 2020.07.07

시옷의 세계

김소연 작가 하면 이 먼저 떠오른다. 그 책에 대한 인상이 워낙 강하게 남아있어서다. 마음을 지긋이 또는 예리하게 바라보는 작가의 감성에 빨려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했는데 이 책이 조금은 해결해줬다. 는 시옷으로 시작하는 낱말을 주제로 하여 작가의 속내를 드러낸 책이다. 사라짐, 사소한 신비, 산책, 살아온 날들, 상상력, 새기다, 새하얀 사람 등 서른네 항목으로 되어 있다. 글 속에는 작가의 삶과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부제가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이다. 선택적 가난과 고결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작가는 삶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을 따라가느라 우리가 내팽개친 잊혀진 가치들을 다시 소환한다. 우리가 누리는 윤택함이 얼마나 많은 이에게 빚지고 있는지..

읽고본느낌 2020.06.27

한 글자 사전

의 후편이라 할 수 있다. 김소연 시인은 언어와 사물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사전에 나오는 한 글자로 된 낱말을 시인의 예리한 촉수로 더듬어 본 결과물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미소 짓게 하고, 무릎을 치게도 한다. 낱말을 재정의한다는 것은 자기만의 세계를 열어보이는 일이다. 시인을 따라 시늉을 내보지만 이내 벽에 막힌다. 평시에 주변과 내면을 관찰하고 주시한 내공이 쌓이지 않는다면 버거운 작업이다. 책 한 권 분량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작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전편과 비교하자면 은 집중도에서 에 미치지 못한다. 이 책이 부실하다기보다 전편의 감동이 워낙 컸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한 글자'지만 여러 의미를 가진 단어들의 산만함 때문..

읽고본느낌 2019.07.24

장마 속 갠 날 경안천 걷다

장마 기간이지만 중부 지방은 아직 제대로 된 장맛비는 찾아오지 않았다. 장마전선이 제주도와 남부 지방에서 정체 상태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환한 날, 경안천을 걷다. 같은 태양이라도 스페인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여름 햇볕은 끈적끈적한 편이다. 습도가 높아서 공기가 후덥지근한 탓이다. 반면에 지중해의 태양은 강렬하지만 쨍그랑, 소리가 날 듯 맑고 경쾌하다. 스페인 역시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여름에는 유라시아 대륙 기단의 영향을 받는 모양이다. 하늘 색깔이 참 예쁘다. 이 산책로는 흙길이었는데 어느새 시멘트로 포장해 버렸다. 길 걷는 아기자기한 맛이 사라졌다. 시멘트에서 나오는 열기도 대단하다. 그대로 뒀으면 더 좋았으련만..... 한낮의 햇살이 따가워 예상했던 길을 다 걷지 못하다. 자꾸 나무 그늘을 따..

사진속일상 2019.07.13

그래서 / 김소연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를 안 듣고 싶어요 ..

시읽는기쁨 2018.12.02

마음사전

사람을 지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난 지성적인 쪽에 속한다고 해야겠다. 이제껏 살아온 길이 그러했다. 감성은 애써 무시했고, 오직 이성만이 믿고 따를 만하다고 생각했다. 애초 감성이 발달하지도 않았지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감성의 감촉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나 자신이 점점 감성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감성의 미묘한 촉감을 즐길 수도 있게 되었고, 불분명하긴 하지만 감성이 가리키는 길에서 빛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도 생긴다. 사람에게 존재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양면성이 바로 지성과 감성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는 얼음처럼 차갑고, 하나는 섬세하며 따스하다. 하나가 부성적이라면, 하나는 모성적이다. 지성이 산문이라면, 감성은 시다. 지..

읽고본느낌 2008.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