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어금니 깨물기

샌. 2023. 4. 24. 10:27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이다. 시인의 이름을 들으면 제일 먼저 <마음사전>이 떠오른다. 시인의 사전에서 단어들이 영롱하게 꽃 피는 것을 감탄하며 바라봤었다. 그 뒤로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을 읽어봤으니 정작 시보다 산문을 더 많이 접한 셈이었다. 시인의 예민한 감성의 촉수가 내 무딘 마음을 간지리는 책들이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자주 어금니를 깨물었다." 책 제목으로 쓰인 '어금니 깨물기'가 어떤 의미인지를 알 것 같다. 회복을 갈망해 온 울퉁불퉁한 시간들의 기록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이 책에는 치매를 앓으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타자를 향한 애틋한 마음씨가 요란하지 않으면서 따스하게 그려져 있는 글들이다.

 

책 표지에는 시인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다.

 

"시인. 수없이 반복해서 지겹기도 했던 일들을 새로운 일들만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숨쉬기. 밥 먹기. 일하기. 또 일하기. 낙담하기. 믿기. 한 번 더 믿기. 울기. 울다가 웃기. 잠들기. 이런 것들을 이제야 사랑하게 되었다. 시가 너무 작아진 것은 아닐까 자주 갸우뚱하며 지냈고, 시가 작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커다래졌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중이다."

 

시인의 글 하나를 옮긴다. 제목이 '2030년 1월 1일 화요일 맑음'인 글 중 일부인데 미래에 쓰는 일기 형식으로 시인의 바람을 담고 있다.

 

에너지 고갈을 적극적으로 지연시키기 위해서 인류가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했다면? 냉장고가 소형화되고 에어컨이 가솔린 자동차와 더불어 금지되어 있다면? 가구당 전기 사용이 극히 소량으로 제한된다면? 플라스틱 사용과 육식이 금지된다면? 메일은 한 번 읽으면 사라지고, 모두의 SNS도 다음 날 자정을 기해서 사라져버리는 시스템이 되어버렸다면? 방에 불을 켤지, 컴퓨터를 켜서 잠시 업무를 볼지 선택해야 할 정도로 전기를 사용하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면?

모든 메모를 수첩에다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글도 연필로 공책에다가 써서 지우개로 지워가며 수정을 할 것이다. 생각이 술술 풀릴 때에는 글씨를 빨리 쓰다가 다시 읽어볼 때에 잘 알아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천천히 생각하며 덜 고칠 수밖에 없게, 신중히 한 문장 한 문장을 쓰게 될 것이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고 나면 책상 위에는 지우개 가루가 수북하게 될 것이다. 다 쓴 글을 정서하기 위해 타자기에 종이를 끼울 것이다. 손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을 것이다. 답장을 받으려면 나흘이나 닷새 정도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열쇠를 열쇠 구멍에 넣어 현관문을 열 것이다.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하는 건 일요일마다 하게 될 수도 있다. 추위를 덜기 위해서 내의를 입고 양말을 두 겹으로 신고 두꺼운 잠옷 위에 두꺼운 카디건을 껴입고 실내에서 생활할 것이다. 그리고 해가 지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잠을 잘 것이고 해가 뜰 무렵에 일어날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하여 공공도서관에 가서 줄을 서게 될 수도 있고, 그게 번거로워서 꼭 필요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굳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공공도서관에 매일같이 드나들며 새로 들여온 책들을 살펴보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동네 서점에 가서 신중하게 책구경을 하다가 한 권을 구입해 올 것 같다. 핸드폰도 컴퓨터처럼 사용을 삼가다 점차 없애는 추세가 될 수도 있다. 유선전화가 다시 보편화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ㅇㅇ씨 좀 바꿔주세요"라고, 그의 동료나 가족에게 공손하게 말하고 잠시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세탁기보다는 손빨래를 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고, 전자레인지나 오븐 같은 소형 가전들 없이 사는 일에 익숙해질 것이다.

친구가 놀러 오면 방에 깔아둔 이불을 함께 덮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것 같다. 여름이면 부채를 손에 들고 다니고, 해 질 녘 등목 정도로 더위를 식히며 씻는 일을 갈음할 것 같다. 옷을 새로 사는 일에 죄책감이 수반될 테지만, 어쩌다 너무나도 특별한 때에 옷 가게에 들어가 새 옷을 고른다면, 내가 내민 신용카드를 받아든 가게 주인이 먹지로 된 용지를 그 위에 얹고 볼펜 같은 것으로 문지르는 동작을 짐짓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