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4

한국은 노래방 / 김승희

당신은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사람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분 넘게 앉아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에게 노래를 부를 것을 권한다 강요한다 애소하고 명령한다 노래방에서 당신 혼자만 노래를 부르지 않고 삼십분 넘게 앉아있어 본 적 있는가 당신은 남북통일에 반대하는 사람 DMZ를 만드는 사람 수원지에 독극물을 붓는 사람 성수대교를 무너뜨리는 사람 백범 김구를 암살한 바로 그, 그, 그 장본인이 된다 길은 이것뿐이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남겨두고 노래방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당신은 아웃사이더가 된다) 노래를 부르라고 부르라고 잡아끄는 친구들의 팔목을 절단해 버리고 친구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당신은 체제 부정자가 된다) (이제 당신은 비로소 노래부르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시읽는기쁨 2019.04.03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 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

시읽는기쁨 2013.01.29

육십이 되면 / 김승희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 정든 땅 정든 집을 그대로 두고 장농과 식기와 냄비들을 그대로 두고 육십이 되면 나는 떠나리라 갠지스 강가로 딸아, 안녕히, 그동안 난 너를 예배처럼 섬겼으니, 남편이여, 그대도 안녕, 그동안 그렸던 희비의 쌍곡선을 모두 잊어주게 축하한다는 것은 용서한다는 것, 그대의 축하를 받으며 난 이승의 가장 먼 뱃길에 오르리 생명의 일을 모두 마친 사람들이 갠지스 강가에 누워 태양의 괴멸작용을 기다린다는 곳, 환시인 듯 허공 중에 만다라花가 꽃피며, 성스러운 재와 오줌이 혼합된 더러운 갠지스 물을 마시며 이승의 정죄와 저승의 빛을 구한다는 더러운 순결의 나라로 해골의 분말이 물 위에 둥둥 뜨면 해와 달과 별이 그려진 거대한 수레바퀴가 반짝반짝 혼령을 실어나르고 미쳐도 오직 신령으로 미친..

시읽는기쁨 2010.05.17

솟구쳐 오르기 /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한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솟구쳐 오르기 / 김승희 봄은 영어로 Spring, ..

시읽는기쁨 2008.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