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8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 와. 봄 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 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 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 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 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 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광주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우연히 후배 B를 만났다. 성체를 영하는 줄에 그가 서 있었다. 그만의 약간..

시읽는기쁨 2012.08.26

해미읍성 회화나무

해미읍성에는 천주교 박해의 상흔이 남아 있다.이 회화나무도 그중 하나다.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어 철삿줄로 머리채를 감고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하고 죽였다. 1790~1880년대에 일어난 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적어도 1천 명은 될 거로 추정한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붙잡혀온 신자 수가 너무 많아그냥 구덩이에 밀어 넣고 생매장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수령 300년 정도인 이 회화나무는 자신의 몸에 매달린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또한 얼마나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을 들었을 것인가. 그래선지 나무는 기력이 많이 상해 있다. 나무도 속울음을 슬피 울었으리라. 가톨릭에서는 이 나무를 순교목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해미성지 안에 있는 기념관..

천년의나무 2012.04.27

방을 얻다 /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들어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 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깃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시읽는기쁨 2012.01.25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 나희덕

이를테면, 고드름 달고 빳빳하게 벌 서고 있는 겨울 빨래라든가 달무리진 밤하늘에 희미한 별들 그것이 어느 세월에 마를 것이냐고 또 언제나 반짝일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고 희미하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게 세상엔 얼마나 많으냐고 말입니다 상처를 터뜨리면서 단단해지는 손등이며 얼어붙은 나무껍질이며 거기에 마음 끝을 부비고 살면 좋겠다고, 아니면 겨울 빨래에 작은 고기 한 마리로 깃들여 살다가 그것이 마르는 날 나는 아주 없어져도 좋겠다고 말입니다 - 빨래는 얼면서 마르고 있다 / 나희덕 세상 돌아가는 내막을 알면 환멸을 느끼게 될 거라고 했다. 점심 식사자리에서 앞의 동료는 그래도 진실을 알고 행동하고 싶다고 씩씩하게 말했다. 도저히 마를 것 같지 않은 고드름..

시읽는기쁨 2008.09.19

부패의 힘 / 나희덕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새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을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되는 나여 - 부패의 힘 / 나희덕 돌아가신 장인 어른은 평상시 딸네미들이 마음에 안 들 때면 "썩을 년!"이라고 혼자 중얼거리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썩을 년'은 욕이 아니다. 제대로 된 욕이라면 '썩지 않을 년!'이라고 해야 맞다. 최고의 명당자리가 어디인가. 시신이 빨리 썩을 수 있는 곳이 좋은 자리다. 자신이 ..

시읽는기쁨 2007.09.06

지율 스님

지율 스님의 소식이 안타깝다. 80여일의 단식 중에 홀연히 잠적해서 가까운 사람들도 그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지난 번 법원 판결 이후 스님이 내건 조건도 많이 완화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정부 측에서는 '법대로'를 외치며 무시해버리는 듯해서 더욱 우울하다. 스님의 단식에 대해 일부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천성산이라는 지역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스님이 말하는 대로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자는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보아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고 또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생존할 수도 없다. 그런데 현대 문명과 인간이 가진 힘은 이제 자연을 이용하는 정도를 넘어 자연을 훼손하고 뭇 생명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젠 그런 예를..

길위의단상 2005.01.23

소리들 / 나희덕

승부역에 가면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구름 옮겨가는 소리 지붕이 지붕에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 소리에 뒤척이는 길 위로 모녀가 손 잡고 마을을 내려오는 소리 발 밑의 흙이 자글거리는 소리 계곡물이 얼음장 건드리며 가는 소리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송아지 다시 고개 돌리고 여물 되새기는 소리 마른 꽃대들 싸르락거리는 소리 소리들만 이야기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겨울 승부역 소리들로 하염없이 붐비는 고요도 세 평 - 소리들 / 나희덕 소리가 끊어져야 소리가 들린다. 진공이 단순한 무(無)가 아니듯, 우리 귀의 고막을 울리지 않는다고 소리 없음이 아니다. 오히려 들리지 않는 소리로 가득하다.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 대음희성(大音希聲)...... 세상..

시읽는기쁨 2004.12.09

귀뚜라미 / 나희덕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 소리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이 시는 작년에 어느 분이 코멘트에 올려준 것이다. 이 시를 가사로 한 안치환의 노래도 있다고 하는데 귀뚜라미의 애절하고 외로운 울음이 고독한 현대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아 누구에게나 공감이 갈..

시읽는기쁨 2004.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