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11

자산어보

"양반도 상놈도 없고, 임금도 신하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영화에 나오는 정약전의 독백이다. 그렇다면 정약전은 동생인 정약용보다 훨씬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가졌는지 모른다. 조선 시대 유학자가 이런 사상을 품었다고 보기 어렵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정약전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멋진 대사다. 실제로 노론 사이에서는 정약용보다 정약전이 더 위험한 인물이라는 평이 있었다. 그래서 정약전의 유배지가 절해고도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1801년, 정조라는 방패막이 사라지자 남인을 향한 신유박해의 피바람이 불고 정약종은 순교를 한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각각 흑산도와 강진에 갇힌다. 잘 나가던 집안이 하루아침에 폐족이 된 것이다. 정약전은 16년간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유배 중 죽었고, 정약용은..

읽고본느낌 2021.05.25

정약용의 여인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가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한 여인의 시중을 받았고 딸까지 낳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여인의 이름은 진솔이고 딸은 홍임이다. 다산이 18년 간의 유배를 마치고 마재로 돌아올 때 진솔과 홍임도 동행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불명확하지만 다산에게 소실이 있었다고 해서 그분의 학문이나 인격에 흠이 되지는 않을 텐데, 후학들이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쉬쉬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에 흥미를 느끼던 차에 찾아본 책이 최문희 작가의 소설 이다. 소설에는 다산의 유배 생활을 중심으로 부인인 혜완(惠婉), 그리고 유배지에서 만난 진솔과 홍임의 이야기가 얽혀서 나온다. 혜완은 명문가의 따님으로 다산보다 한 살 위였다. 혜완은 선비집 안방마님으로서의 위엄..

읽고본느낌 2021.05.09

다산, 행복의 기술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은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정사의 중심에 있었으나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18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형제들도 죽거나 유배를 가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그야말로 폐족이 되었다. 이런 고난 속에서 다산은 자신의 내면적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만의 행복을 찾아나갔다. 은 다산의 삶과 고난을 따라가며 어떻게 내면의 상처를 극복하고 행복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살핀다. 다산은 갑작스러운 권력 상실의 트라우마, 배신감, 모욕감, 유배지에서의 고독, 부자유의 고통, 경제적 고통 등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남들 같으면 포기하고 좌절했을지 모르나 다산은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그 가운데서 의미를 찾으며 행복으로 가꾸어 나갔다. 인간..

읽고본느낌 2021.04.08

여유당

마음이 울적한 탓인지 '여유당'을 찾고 싶었다. '여유당(與猶堂)'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로 다산이 태어날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마재마을)였지만, 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되어 있다. 선생이 형조참의로 있던 1799년(정조23년)에는 선생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정조의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천주교와의 연루 등 정치적 비판을 견디지 못한 다산은 이듬해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여유당'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은신했다. 선생은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일을 처리하는 지모(智謨)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 하나 선택하여 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 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

사진속일상 2020.07.11

나 홀로 웃노라 / 정약용

有栗無人食 多男必患飢 達官必倡愚 才者無所施 家室少完福 至道常陵遲 翁嗇子每蕩 婦慧郞必癡 月滿頻値雲 花開風誤之 物物盡如此 獨笑無人知 - 獨笑 / 丁若鏞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아들 많은 집은 허구한 날 끼니 걱정 벼슬 높은 사람은 으례 멍청하고, 재주 있는 사람은 펼 길이 없다오 복 많아도 다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라도 무너지기 마련 아비가 절약하면 자식은 흥청망청, 아내가 똑똑하면 남편은 꼭 바보라오 달이 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피면 바람이 심술 부려 세상만사 다 이러하니, 사람들은 모르리라 나 홀로 웃는 까닭 이만큼이라도 살아보니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세상사가 내 뜻대로는 안 된다." 도모하는 일은 자주 어긋나게 마련이고, 열에 아홉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시읽는기쁨 2019.08.02

담박 / 정약용

담박을 즐기니 한 가지 일도 없어 타향의 살림살이 외롭지만은 않네 손님 오면 꽃 아래로 시권을 가져오고 중 떠난 침상 곁엔 염주가 남아 있지 한낮이면 채마밭에 벌이 한창 붕붕대고 따순 바람 보리 이삭 꿩이 서로 부르누나 우연히 다리 위서 이웃 영감 만나 조각배 함께 타고 진탕 마실 약속했네 - 담박 / 정약용 淡泊爲歡一事無 異鄕生理未全孤 客來花下携詩券 僧去牀間落念珠 菜莢日高蜂正沸 麥芒風煖雉相呼 偶然橋上逢隣수 約共扁舟倒百壺 - 淡泊 / 丁若鏞 '담박(淡泊)'이란 말이 좋다. '물 맑을 담(淡)'에 '머무를 박(泊)'이다. '담백함에 머무르다'는 뜻이겠다. 욕심 없고 순박한 마음, 무위(無爲)의 마음이다. 무엇을 인위적으로 함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시간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꽃 아래서..

시읽는기쁨 2017.07.28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초판이 나온지 20년이 넘은 책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하며 고향에 있는 두 아들, 흑산도에 유배된 형,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이다. 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엿보는데 편지만큼 솔직한 것도 없다. 다산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근엄한 학자가 아닌 이웃집 아저씨 같은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만나게 된다. 다산 역시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했고,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을 기뻐했다. 지켜야 할 예절에서부터 채소밭 가꾸는 방법까지 가르쳐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또한 형의 건강을 염려해서 개고기 요리하는 법까지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절로 미소가 일어난다. 번역한 이는 다산을, '칠흑같이 어두운 봉건시대에 실낱 같은 한 줄기의 민중적 의지로 75년 동안 치열하게 살다가 사라져간 위대한 인..

읽고본느낌 2012.11.25

밤 한 톨을 다투는 세상

저녁 무렵에 숲속을 거닐다가 우연히 어떤 어린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숨이 넘어가듯 울어대며 참새처럼 수없이 팔짝팔짝 뛰고 있어서 마치 여러 개의 송곳으로 뼛속을 찌르는 듯 방망이로 심장을 마구 두들기는 듯 비참하고 절박했다. 어린애는 잠깐 사이에 목숨이 끊어질 듯한 모습이었다. 왜 그렇게 울고 있는지 알아보았더니 나무 아래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아아! 세상에 이 아이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저 벼슬을 잃고 권세를 잃은 사람들, 재화를 손해본 사람들과 자손을 잃고 거의 죽게 된 지경에 이른 사람들도 달관한 경지에서 본다면, 다 밤 한 톨에 울고 웃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아들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어릴 적에는 목숨보다 더..

참살이의꿈 2012.11.24

굶주리는 백성 / 정약용

1 우리 인생 풀과 나무와 같아 물과 흙으로 살아간다네. 힘써 일해 땅엣것을 먹고 사나니 콩과 조를 먹고 사는 게 옳건만 콩과 조가 보석처럼 귀하니 무슨 수로 혈기가 좋을쏘냐. 야윈 목은 고니처럼 구부러지고 병든 살은 닭 껍데기처럼 주름졌네. 우물이 있어도 새벽에 물 긷지 않고 땔감이 있어도 저녁에 밥 짓지 않네. 팔다리는 그럭저럭 놀리지만 마음대로 걷지는 못한다네. 너른 들판엔 늦가을 바람이 매서운데 저물녘 슬픈 기러기는 어디로 가나? 고을 원님이 어진 정치를 하고 사재(私財)로 백성 구휼한다기에 관아 문으로 줄지어 가 끓인 죽 우러르며 앞으로 나서네. 개돼지도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것을 사람이 엿처럼 달게 먹는구나. 어진 정치는 기대도 않았고 사재 털기도 기대치 않았네. 관아의 재물은 꽁꽁 숨겼으니 ..

시읽는기쁨 2012.11.02

유배지의 여덟 취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시를 읽고 있다. 7세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해 74세 되던 해에 아내와의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시가 마지막이었다니 선생의 일생은 시와 함께 했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의 시를 통해 내면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고, 고상한 인품도 느껴볼 수 있어서 좋다. 유배지에서 쓴 시 중에 '유배지의 여덟 취미'라는 게 눈에 띈다. 18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을 선생만큼 아름답게 승화시킨 분도 없을 것이다. 책 읽고 글 쓰는 외에 선생은 유배지에서 어떤 취미를 가지고 살았을까? '유배지에서의 여덟 취미' - 바람에 읊조리기, 달구경, 구름 보기, 비 바라기, 산에 오르기, 물가에 가기, 꽃구경, 버드나무 완상하기 - 를 보며 선생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읽는다. 바람에 읊조리기 서풍은 집을 지나오고 동..

참살이의꿈 2012.11.01

애절양 / 정약용

갈밭 젊은 아낙 오랫동안 울더니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는다 출정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있다 해도 사내가 제 자지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구나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다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다며 억울한 하소연 하려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간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다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땅의 자식 거세도 진실로 슬픈 것이거늘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거늘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

시읽는기쁨 2011.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