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 14

산수 시간 / 유금옥

"개 삽니다아 발바리 삽니다아"시골길에, 확성기를 단트럭이 돌아다닙니다. 순호가 교실 밖으로살금살금 달아납니다. 강아지풀이 꼬리를 흔드는파아란 밭둑길을 뛰어갑니다.복슬복슬한 흰 구름도 따라갑니다. "개 삽니다아 발바리 삽니다아"시골길에, 목쉰 트럭이기웃기웃 돌아다닙니다. 순호가 교실 안으로 살금살금강아지를 안고 들어옵니다. 친구들이 3, 1은 3. 3, 2, 63, 3, 9. 구구단을 외우고 있습니다.목소리를 점점 높여 줍니다. - 산수 시간 / 유금옥 어제 관악산에서 초등 동기들 모임이 있었다. 나는 나가지 않았지만 일흔을 훌쩍 넘긴 영감들 사진이 단톡방에 무더기로 올라왔다. 내 눈은 스르르 감기면서 타임머신을 탄 듯 60년 전으로 돌아간다. 아마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었을 것이다.  십 년이면 강..

시읽는기쁨 2024.06.16

내가 봐도 우습다 / 안정복

늙은이 나이가 팔십에 가까운데날마다 어린애들과 장난을 즐기네 나비 잡을 때 뒤질세라 따라갔다가매미 잡으러 함께 나가네 개울가에서 가재도 건지고숲에 가서 돌배도 주워오지 흰머리는 끝내 감추기 어려워남들이 비웃는 소리 때때로 들려오네 翁年垂八十 日與小兒嬉捕蜨爭相逐 점蟬亦共隨磵邊抽石해 林下拾山梨白髮終難掩 時爲人所嗤 - 내가 봐도 우습다(自戱效放翁) / 안정복(安鼎福)  순암 안정복 선생은 18세기를 살았던 유학자였다. 이웃 동네에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이택재(麗澤齋)'라는 서재가 있다. 앞에는 영장산이 있고 뒤에는 국수봉이 감싸고 있는 아늑한 동네다. 선생은 성호 이익(李瀷)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며 영향을 받았다. 실학자로 분류되지만 보수적이어서 평생 주자학을 신봉하며 새로운 학문을 추구..

시읽는기쁨 2024.04.27

괴물

열흘 전에 개봉한 따끈따끈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따스한 인간애를 다루지만 대체적으로 밍밍한데, 이 영화는 관객을 살짝 긴장시키면서 우리 사회 및 인간의 내면을 잘 담아낸 수작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 중 최고라고 할 만하다. '괴물'은 학교 폭력을 배경으로 깔고 있지만 학교 폭력이나 인간 심성의 사악함을 고발하는 영화는 아니다. 같은 사안이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나 평가가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진실과 허위, 선과 악을 칼로 자르듯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영화는 3막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어머니인 사오리, 교사인 호리, 사건의 중심에 있는 두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교차한다. 영화의 중심은 미나토와 요리, 두 아이가 ..

읽고본느낌 2023.12.10

두 가지를 경계한다

늙어지면서 두 가지를 경계한다. 하나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어가는 것이다. 노화는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이 퇴화하는 과정이다. 하늘로부터 받고 누린 것을 하나하나 돌려줘야 한다. 상실이 순리라고 할지라도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어린아이의 마음이다. 나는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 가슴이 뛰는가. 어린 손주의 해맑은 웃음, 왕성한 호기심,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앞에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동시에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자각케 한다. 워즈워스는 무지개를 보며 노래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마찬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무지개'는 자연에 대한 감성과 경이감일 것이다. 어린..

참살이의꿈 2022.09.11

씨팔! / 배한봉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 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 씨팔! / 배한봉 에 보아뱀 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왕자가 보아뱀이 코끼리를 잡아먹은 그림을 그렸지만, 어른들은 모자 그..

시읽는기쁨 2019.09.18

쫄딱 / 이상국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느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 쫄딱 / 이상국 포터 트럭에 싣고 온 짐을 컨테이너에 넣을 때 마음 사람들이 뒤에서 수군댔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저 집은 망해서 온 모양이야." 나도 경험한 일이다. 사람들의 연민 어린 눈빛이 그런 거였구나. 돈 많다고 거들먹거려서는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먹물 티도 마찬가지다. 도..

시읽는기쁨 2015.09.24

귀엽게 나이 들기

나이가 60이 넘어도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건 어떨까? 얼마 전의 일이다. 모임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앞에 앉은 사람이 나한테 귀엽다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어리벙벙했지만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분은 형님뻘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전에 학교에 있을 때는 코흘리개 아이들한테서도 그런 소리를 가끔 들었다. 웃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난감했다. '귀엽다'는 내 평생을 따라다니는 단어다. 어렸을 때는 은근히 자랑스러웠지만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너무 창피하게 느껴졌다. 뭔가 모자라고 덜 떨어진 인간이 된 듯하여 주눅 들기 일쑤였다. 하물며 어른이 되어서는 오죽하겠는가. '멋있다'거나 '남자답다'는 말은 나에게는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런데 단 한 번 예외가 있었다. 한 친구로부터 살짝 그..

참살이의꿈 2015.09.11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짧게 가자 빠르게 가자 무의미하게 가자 그녀는 잊기 위해 드라마로 간다 그녀는 알레고리에 익숙하다 판타지에 익숙하다 리얼리즘은 천박해 부담스러워 상징적으로 가자 모자 쓰고 가자 가리마도 가리고 바로 클라이맥스로 간다 한일강제합병은 모른다 진주가 어디 붙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익숙하고 온갖 암호와 예측에 충분히 익숙하다 나는 거꾸로 가자 예측 불가능하게 가자 벌거벗은 몸뚱이로 가자 저 강변 항하사 같은 금모래밭 남풍에 반짝이며 팔랑이는 미루나무 이파리 그 오르가슴을 나는 잊지 못한다 - 거꾸로 가자 / 윤재철 세상 사람들과는 거꾸로 살아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듯하다. 오히려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인지 모른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때 아니오, 라고 답하라. 계단을 내려가면 ..

시읽는기쁨 2014.03.20

장난감 / 타고르

아이야, 너는 땅바닥에 앉아서 정말 행복스럽구나, 아침나절을 줄곧 나무때기를 가지고 놀면서! 나는 네가 그런 조그만 나무때기를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나는 나의 계산에 바쁘다, 시간으로 계산을 메꾸어버리기 때문에. 아마도 너는 나를 보고 생각할 것이다. '아침 나절을 저렇게 보잘것없이 보내다니 참말로 바보 같은 장난을 하시네!' 하고. 아이야, 나는 나무때기와 진흙에 열중하는 법을 잊어버렸단다. 나는 값비싼 장난감을 찾고 있다, 그리고 금덩이와 은덩이를 모으고 있다. 너는 눈에 띄는 어떤 물건으로도 즐거운 장난감을 만들어낸다. 나는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물건에 나의 시간과 힘을 다 써버린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大海)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나 역시 유희를 하고..

시읽는기쁨 2013.05.16

무당벌레 / 김용택

아랫도리를 발가벗은 아가가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쪼그려 앉더니 뒤집어진 무당벌레를 손가락으로 툭 건듭니다. 무당벌레가 뒤집어지더니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갑니다. 아가가 우우우우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무당벌레를 가리키다가 자기 손가락을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 무당벌레 / 김용택 어린아이는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었다고 여긴다. 하늘의 구름과 내리는 눈은 살아있지만, 정원의 꽃나무는 죽은 것이다. 뒤집어져 움직이지 못하던 무당벌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은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처럼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자기 손가락이 닿으니 그렇게 되었다. 모든 것이 경이 그 자체다. 어린아이는 사물 사이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무지하다고 부를 수도 있고, 순수..

시읽는기쁨 2012.12.16

그 기쁨의 순간들은 / 심호택

도대체 어디로 날아갔나 그 기쁨의 순간들은 살구철이 지난 어느 날 우거진 잎새 사이에서 얼핏! 샛노란 살구 하나 찾아냈을 때 고구마 캐낸 빈 밭에서 무심코 쟁기질 뒤따르는데 덜렁! 고구마 한 덩이 뒤집혀 나올 때 사정없이 가슴이 콩당거리던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 그 기쁨의 순간들은 / 심호택 신문에서 시인의 부음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밤중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운명하셨다고 한다.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시인은 유년 시절의 동심을 그립도록 아름답게 묘사해 내는 솜씨가 뛰어나셨다. 특히 '그만큼 행복한 날이'는 가슴을 울리는 절창이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놓고 봐라 ..

시읽는기쁨 2010.02.02

여행자

'여행자'는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계 프랑스인 우니 르콩트(Ounie Lecomte)의 자전적 이야기로, 70년대 서울 근교에 있는 가톨릭계 보육원을 배경으로 한 9살 소녀의 이별과 아픔을 가슴 시리게 그리고 있는 영화다. 어제 저녁 '시네코드 선재'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았다. 주인공 진희를 비롯한 아이들이 가여웠지만 결국은 나와 우리들에게도 공통된이야기다. 처음에는 진희가 안타까워서 울고, 나중에는 가련한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울게 된다. 인생은 이별과 상실, 고통의 연속이다. 상처와 아픔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진희는어린 나이에 아빠로부터 버림 받고 보육원에 맡겨진다. 작은 영혼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운명이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진희는 아빠를 그리워하며 탈출을 시도하지만 정작 ..

읽고본느낌 2009.11.20

나만의 비밀 / 안도현

개울에서 놀다가 그만 급해서 물속에 앉아 쉬를 하고 말았습니다 행여 누가 볼까 두리번두리번 나 혼자 몸을 한 번 떨었습니다 개울물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고추를 살살 씻어 주었습니다 - 나만의 비밀 / 안도현 이런 동시를 읽으면자꾸 눈물이 난다. 저런 동심이 나에게도 있었었나 싶은, 이젠 흔적조차 희미해져 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서글픔 때문일지 모른다. 개울에서 쉬한 것이 부끄러웠던 시절에서 이젠 목욕탕에서도 눈 딱 감고 시치미 뗄 수 있는 나이로 되었다. 무례하고 뻔뻔해도 당당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그런 것이리라. 이 동시의 백미는 끝 구절이 아닐까? '개울물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고추를 살살 씻어 주었습니다'- 자연과 동심의 아름다운 어울림에 절로 미소가 일면서 잠시 눈..

시읽는기쁨 2007.08.14

동심의 그늘

동심(童心)이라는 말만큼 향수를 자극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동심은 모든 그리움의 원형이며, 그 속에는 인간 존재의순수함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린 한 때 이 동심의 기간을 지나왔지만, 그러나 철이 들면서 동심은 이미 다다를 수 없는 세계로 멀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더욱 신비한 동화의 세계로 남아있게 됩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은 아름답게 채색되어 나타납니다. 그것은 과거의 회상이 주는 필터링 효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들에게 있어 가혹했던 군대 시절마저 추억에서는 아름답고 멋진 기억으로 탈바꿈합니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과거가 지나고 보면 아름답게 기억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내면 심리는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지워버리는 기법이 있는지 모릅니다. 아마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기..

참살이의꿈 200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