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 5

탄천의 저녁

분당의 바둑 모임이 끝나니 저녁 시간이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때가 해질녘이 아닌가. 발걸음은 자연스레 탄천으로 향했다. 이번주 초반의 강추위에 얼어붙었을 텐데 며칠간 날이 풀리더니 다 녹았는가 보다. 강물은 윤슬로 반짝였다. 겨울바람이 누그러진 탄천의 하늘은 고우면서 아늑했다. 캄보디아에서 돌아오고 나서 일주일 동안 두문불출했다. 몸이 피곤했지만 마음도 일말의 저기압 상태에 빠졌다. 폐허가 된 앙코르 유적이 준 느낌이 귀국 후에도 남아있었던 것 같다. 인생살이의 덧없음이랄까, 뭐 그런 쓸쓸함과 우울한 감정에 잠겼던 탓이다. 문명의 흥망성쇄를 축소하면 개인에게도 그대로다. 살아 애지중지 추구하는 것들이 결국은 바람에 흩날리는 지푸라기와 같지 않은가. 영겁의 시간 속에서 인간 존재와 행위의 의미..

사진속일상 2024.01.28

중은(中隱) / 백거이

大隱住朝市 小隱入久樊 丘樊太冷落 朝市太囂喧 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 似出服似出 非忙亦非閑 不勞心與力 又免饑與寒 終歲無公事 隨月有俸錢 君若好登臨 城南有秋山 君若愛游蕩 城東有春園 君若欲一醉 時出赴賓筵 洛中多君子 可以恣歡言 君子欲高臥 但自深俺關 亦無車馬客 造次到門前 人生處一世 其道難兩全 賤即苦凍餒 貴即多憂患 唯此中隱士 致身吉且安 窮通與豊約 正在四者間 제대로 된 은자는 조정과 저자에 있고 은자입네 하는 이들 산야로 들어가지만 산야는 고요하나 쓸쓸하기 짝이 없고 조정과 저자는 너무 소란스럽네 그 둘 모두 한직에 있는 것만 못하니 중은(中隱)이란 일 없는 직에 머무르는 것이라 출사한 것 같으면서 은거한 것 같고 바쁜 것도 그렇다고 한가한 것도 아니라네 몸과 마음 힘들어 할 까닭도 없고 추위와 주림도 면할 수가 있으며 ..

시읽는기쁨 2020.07.14

종남별업 / 왕유

중년 이후에는 도를 더욱 좋아하여 만년에 종남산 기슭에 별장을 마련했네 흥이나면 홀로 그곳으로 찾아가나니 얼마나 좋은지는 오로지 나만이 알 뿐이라 걷고 또 걸어 물길 시작되는 곳에 이르러 가만히 앉아서 피어오르는 구름을 본다 우연히 산속에서 산골 노인을 만나 담소를 나누다가 돌아가는 길 잊었다네 中歲頗好道 晩家南山수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偶然치林수 談笑無還期 - 終南別業 / 王維 시불(詩佛)로 불리는 왕유(701~761)의 전원 예찬이다. 왕유는 종남산 기슭에 터를 마련하고 관료 노릇을 하는 틈틈이 은둔 생활의 정취를 즐겼다. 말년에는 별장을 짓고 속세에서 떠나 불교에 심취하며 초연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 시는 그 시절에 지은 것 같다. 세상사를 잊은 유유자적이 부럽다. 오두막일..

시읽는기쁨 2019.06.22

대주(對酒) / 백거이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불꽃처럼 순간의 삶이거늘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지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그야말로 바보 蝸牛角上爭何事 石火光中寄此身 隨富隨貧且歡樂 不開口笑是痴人 - 對酒 / 白居易 첫 구는 에 나오는 예화다. 전쟁을 일으키려는 혜왕에게 대진인이 이 비유로 말한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나라가 있는데 촉씨라하고, 오른쪽 뿔에 있는 나라는 만씨라 부릅니다. 이들은 서로 땅을 다투며 수시로 전쟁을 하는데 전사자가 수만이라 합니다. 패배자를 쫓을 때는 십오 일 이후에나 돌아오기도 한답니다." 우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달팽이 뿔 위의 다툼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하물며 재물의 많고 적음이야 티끌만도 못한 것이니 이 세상 웃으며 즐겁게 살자고 시인은 술잔을 마주하고 권한다...

시읽는기쁨 2016.03.17

설야 /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밑에 호롱불 여위어가며서글픈 옛 자췬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설야(雪夜) / 김광균 이 시도 나의 애송시 가운데 하나다. 특히 언어적 리듬감이 살아있어 낭송하기에 좋다. 한 번 외우기 시작하면 부드러운 파도를 타는 듯 자연스레 술술 연결된다. 마지막 연의 '흰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는 음악적 리듬감의 극치이다. 시의 ..

시읽는기쁨 2007.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