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산 7

쫄딱 망하기 / 백무산

시골 인심도 예전 같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그 말은 어제오늘 나온 말이 아니다 소설가 백신애가 1930년대에 쓴 글에 요즘 촌부들은 이악해서 도회지 사람들을 속여도 먹는다, 고 썼다 오랜 세월 빨아먹어도 그래도 아직 시골로 남아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시골로 살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 제일 반가운 사람들은 도시에서 망하고 왔다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토목공사를 벌이지 않고 땅장사를 부업으로 하지도 않는다 한 아이가 시골에 이사 와서 동네방네 졸랑졸랑 자랑을 하고 다닌다 우리 아버지 서울에서 쫄딱 망했어요 망해서 즐거운 것은 아이와 땅뿐이다 따지고 보면 우주가 쫄딱 망해서 생긴 것이 땅이다 땅의 마음을 얻었다면 그건 대체로 망한 거다 구름의 발길을 따라갔다면 그건 이미 사전에 망한 거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은 망하..

시읽는기쁨 2018.03.01

그런 날 있다 / 백무산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 그런 날 있다 / 백무산 난 올바르고 넌 글렀어, 이런 생각 하는 건 나무라고 싶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 그런데 자신의 이념을 남에게 강요하면 그건 폭력이 되는 거야. 네가 옳다..

시읽는기쁨 2015.11.03

사람들끼리만 / 백무산

할머니께서 밭에 콩을 심으실 때 한 구멍에 세 알씩 심어 날짐승 들짐승 몫도 챙기셨다고요? 그래요, 그건 이야기 시절의 이야기지요 할머니 가신 뒤의 배곯은 산꿩이 내려와 세 알 다 쪼아먹고 멧돼지가 와서 밭을 통째 뒤집고 메뚜기가 떼로 덤비고 까치가 떼로 날고 깔따구와 여치가 떼로 습격하고 사람들이 떼를 지어 한 일과 사람들이 싹쓸이로 한 일을 저들은 거꾸로 그렇게 합니다 할머니 이야기엔 그들도 함께 둘러앉을 자리가 있었습니다 두꺼비도 까치도 온갖 미물들도 둘러앉고 산신도 용왕도 집안의 업의 눈치도 살피고 짐승들이 들을까 알곡들이 삐칠까 나무가 속상해할까 소곤소곤 입조심 하느라 이야기 속에 그들 자리가 있었습니다 할머니 가신 뒤로 세상의 이야기는 사람끼리만 사람의 말로만 떠들고 있습니다 세상은 많은 이야..

시읽는기쁨 2014.09.26

감수성 / 백무산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분이 돌아가시면서 전재산 십억이 넘는 돈을 모교인 국립서울대학교에 기부하고 갔습니다 살아 계실 때 온화한 모습 그대로 얼마 뒤 부산 사는 진순자(73) 할머니는 군밤장수 야채장사 파출부 일을 하며 평생 모은 일억 팔백만원을 아프리카 최빈국 우간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우리도 굶주려 원조 받아 공부도 하고 학용품도 사고 그랬단다. 우간다 아이들아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당부도 담아서 농사짓고 공장 일 하는 사람들의 공부 모임에서 시를 공부하다 나온 얘기였는데 누가 내게 물었습니다 둘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나는 계급성이라고 말하려다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계급적 감수성이라고 말하려다 생명의 감수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감수성은 윤리적인 거라고 말하려다 제..

시읽는기쁨 2012.04.17

꽃 / 백무산

내 손길이 닿기 전에 꽃대가 흔들리고 잎을 피운다 그것이 원통하다 내 입김도 없이 사방으로 이슬을 부르고 향기를 피워내는구나 그것이 분하다 아무래도 억울한 것은 네 남은 꽃송이 다 피워내도록 들려줄 노래 하나 내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너와 나란히 꽃 피우는 것은 고사하고 내 손길마다 네가 시든다는 것이다 나는 위험한 물건이다 돌이나 치워주고 햇살이나 틔워주마 사랑하는 이여 - 꽃 / 백무산 저절로 꽃대가 자라고 꽃이 피어나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하늘과 땅이 어우러져 향기를 피워내고 열매를 맺게하니 참으로 잘 된 일이다. 그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우면 시인은 원통하고 억울하다고 했을까. 인간은 정말 위험한 물건이 되었다. 유전자 조작이니, 줄기세포니 하며 생명을 건드리는 ..

시읽는기쁨 2007.07.11

듯 / 백무산

잊은 듯 깜박 잊은 듯 이슬방울이 서로 만난 듯 불을 이고 폭풍우 바다를 이고 사뿐한 듯 눈 한번 감은 듯이 천년 흐른 듯 나인 듯 너인 듯 - 듯 / 백무산 '듯'이라는 말이 이렇듯 아름다운 줄 이제야 알았다. '듯'은 분별과 단정의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함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모두 포용하는 긍정과 상생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물과 불, 순간과 영원, 나와 너가 '듯'이라는 한 마디에 다 녹아 있다. 이 시에는 '반가사유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시읽는기쁨 2006.05.13

야생 / 백무산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야생의 들짐승 야생의 날짐승 그리고 야생의 여자 야생의 수생짐승 그들을 안아볼 때마다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어두운 밤길에서 만나는 산짐승의사나운 눈빛도 밤의 숲 속 짐승들의 거친 교미도 저들끼리 싸워 피 흘릴 때도 나무들이 뿜어대는 뜨거운 열기인 양 야생에는 식물성 냄새가 난다 저들은 분리되지 않은 그리고 분화도지 않은 무수한 촉수와 날카로운 긴장의 그물을 가졌다 대상과도 자신의 몸과도 동물은 사람뿐이다 - 야생 / 백무산 그래 그래 하며 술술 읽히던 시가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뒤통수를 친다 - '동물은 사람뿐이다'. 시인은 식물과 동물로 나누는 대신에 식물성이란 표현을 쓴다. 식물성이란 분리되지 않은, 분화되지 않은 자연과 하나된 상태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것은 자연..

시읽는기쁨 2005.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