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11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길재(吉再, 1353~1419)는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살았던 성리학자다. 고려가 망해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내려가 초야에 묻혔다. 선생의 나이 40세 때 고려가 망했고, 교분이 두터웠던 이방원이 그를 개경으로 초대하여 함께 일하자고 했으나 뿌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응하기만 했다면 부귀영광은 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이 시조는 이방원의 초청으로 옛 왕도였던 개경을 방문했을 때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초야에 묻혀 곧게 살아간 선생의 맑은 기상이 드러나는 한시 '한거(閑居)'다. 臨溪茅屋獨閑居 月白風淸興有餘 外客不來山鳥語 移床竹塢臥看書 개울가..

시읽는기쁨 2024.01.29

탄로가 / 신계영

아이 적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 그동안에 아이들이 나 웃을 줄 어이 알리 아이야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사람이 늙은 후에 거울이 원수로다 마음이 젊었더니 옛 얼굴만 여겼더니 센 머리 씽건 양자 보니 다 죽어만 하아랴 늙고 병이 드니 백발을 어이 하리 소년 행락이 어제론 듯 하다마는 어디가 이 얼굴 가지고 옛 내로다 하리오 - 탄로가(嘆老歌) / 신계영 조선 중기의 문인이었던 신계영(辛啓榮, 1577~1669) 선생이 쓴 늙음을 한탄하는 노래다. 자신의 소년 시절과 비교하며 세월의 무상을 절감하는 노인의 심경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선생은 92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굉장히 장수한 셈이다. 노년의 아픔과 쓸쓸함을 몸소 체험한 바가 컸을 것이다. 나도 이제 선생의 마음에 공감하는 나이가 되었다...

시읽는기쁨 2023.11.22

나의 장례식 / 임채성

눈물은 보이지 마라 내 앞에선 누구라도 슬픔을 꾸미려는 곡소리도 내지 마라 비로소 삶의 완성판 무아無我에 들었으니 추모를 꼭 하려거든 헤비메탈을 울려 다오 회심곡 장송곡이 빈소에 들지 못하도록 이승의 마지막 축제 걸판지게 놀아보자 빛깔부터 마뜩찮은 수의는 입지 않을래 리바이스 청바지에 빨간색 폴로셔츠면 물놀이, 꽃놀이 가듯 발걸음도 가볍겠다 다비 후 뼛가루는 먼바다에 뿌려 다오 내게 먹힌 광어 숭어 그 넋 다시 돌려 놓듯 그들의 살과 피가 돼 태평양을 누벼보게 - 나의 장례식 / 임채성 초등 동기인 S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왔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는 넘겼고 예후를 살핀 후 수술 여부를 결정한단다. 이제 우리는 노(老), 병(病), 사(死)의 단계에 진입했으며 그 과정을 거쳐 가야 한다. 시기의 ..

시읽는기쁨 2022.11.22

매아미 맵다 울고 / 이정신

매아미 맵다 울고 쓰르라미 쓰다 우니 산채를 맵다는가 박주를 쓰다는가 우리는 초야에 묻혔으니 맵고 쓴 줄 몰라라 - 매아미 맵다 울고 / 이정신 매미가 맵다고 울든 쓰르라미가 쓰다고 울든 왜 내가 속을 끓여야 하지? 매미나 쓰르라미가 아니라 아직도 거기에 매여 있는 내 마음 탓인 것을. 열 받고 단톡방을 뛰쳐나왔던 내 속 좁음을 반성한다. 이 시조를 지은 이정신(李廷藎) 선생은 현감을 지낸 조선 영조 때 분이라고 한다. 호는 백회재(百悔齋)다. 백 번을 뉘우쳐야 맵고 쓴 바를 잊는 경지에 이른다고 가르침을 주는 것 같다.

시읽는기쁨 2021.01.11

다정도 병인 양하여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드는 밤이 있다. 주로 윗집의 층간소음 탓이다. 그런데 어젯밤은 아니었다.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를 뵙고 온 날은 심란하여 잠이 안 온다. 어머니가 편찮으시거나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낡게 하고 허물어버리는 잔인한 엔트로피의 법칙을 고향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요사이 같은 늦가을에는 고향을 찾을 일이 아니다. 빨리 내려와서 가을걷이를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연락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흔 연세에도 온갖 농작물을 기르고 거두신다. 그리고 가을이면 수확해서 자식에게 주는 재미로 사신다. 배추, 무, 사과, 깨, 생강, 시래기, 당근, 파, 호박 등 이번에도 차 뒤의 트렁크 하나 가득하였다. 그러나 마냥 기쁘지는 않다. 고맙게 받아오고 잘 먹어주는 게 효도의 하나라고 ..

참살이의꿈 2020.11.24

고향으로 돌아가자 / 이병기

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암 데나 정들면 못살 리 없으련마는 그래도 나의 고향이 아니 가장 그리운가 방과 곳간들이 모두 잿더미 되고 장독대마다 질그릇 조각만 남았으나 게다가 움이라도 묻고 다시 살아 봅시다 삼베 무명옷 입고 손마다 괭이 잡고 묵은 그 밭을 파고 파고 일구고 그 흙을 새로 걸구어 심고 걷고 합시다 - 고향으로 돌아가자 / 이병기 전주 가는 길에 여산휴게소에 들렀더니 '시조시인 만남의 길'이라는 화살표가 있었다. 휴게소 한 켠에 가람 이병기 선생의 작품으로 꾸며진 작은 공원이 있고, 앉아 쉴 수 있는 팔각정 주변에 선생의 시조 작품이 여럿 전시되어 있었다. 생가 안내가 있는 걸 보니 이 지역에서 선생이 나신 것 같다. 이 시조는 제일 큰 시비에 적혀 있었다. 아마 6.25 이..

시읽는기쁨 2019.07.28

왕대폿집 / 구중서

수원화성 화홍문 연못가 왕대폿집 벽에 걸린 주전자가 모과처럼 우그러져 막걸리 젖통을 만진 손들을 알만하다 안주도 안 시키고 막걸리만 들이켜는 넝마주의 단골손님 오늘은 안 보이네 그나마 막걸리 값도 마련이 못 되었나 대폿집 주인장이 문밖을 내다본다 리어카 세워놓고 딴 데 보는 단골손님 주인이 불러들이네 공으로 마시라고 - 왕대폿집 / 구중서 10여 년 전 화성에 갔을 때 찍어둔 왕대폿집 사진이 있다. 거꾸로 달린 간판이 특이해서 한참 들여다봤는데 바로 이 시조에 등장하는 왕대폿집이다. 여기 들리는 사람들은 거꾸로 된 간판이 바로 보일 때까지 마셨다나 어쨌다나, 유명한 집인 줄 그때 알았더라면 나도 한 번 들어가 봤을 텐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지, 주인장 인심도 그대론지, 언제 화성에 다시 가봐야겠다.

시읽는기쁨 2015.10.12

일색변 / 조오현

1 무심한 한 덩이 바위도 바위소리 들을라면 들어도 들어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그 물론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나야 2 한 그루 늙은 나무도 고목소리 들을라면 속은 으레껏 썩고 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 그 물론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들도 남아 있어야 3 사내라고 다 장부 아니여 장부소리 들을라면 몸은 들지 못해도 마음 하나는 다 놓았다 다 들어올려야 그 물론 몰현금(沒弦琴) 한 줄은 그냥 탈 줄 알아야 4 여자라고 다 여자 아니여 여자소리 들을라면 언제 어디서 봐도 거문고줄 같아야 그 물론 진겁(塵劫) 다하도록 기다리는 사람 있어야 5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6 놈이라고 다 중놈이냐 중놈소리 들..

시읽는기쁨 2014.07.16

백팔배를 올립니다 / 최상호

제 일 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생각하며 절합니다. 이 세상 처음 올 땐 인연 따라 온 것일뿐 산 속이든 물 속이든 돌고 도는 순리인즉 한 목숨 누리며 살 때 멈출 자리 봐 둘 일 제 사 배, 나의 진정한 얼은 어디에 있나 생각하며 절합니다. 하늘 뜻 새기는 일 먼 산보며 깨닫는다 땅의 뜻 다지는 일 길 가면서 되새긴다 늘 깨어 바라보는 일 쉬지 않는 이유다 제 십오 배, 하나의 사랑이 우주 전체에 흐르고 있음을 생각하며 절합니다. 달빛을 사랑한 별이 작은 눈을 끔벅이면 한 줄기 바람결이 풍경을 깨우도다 부처도 그윽한 웃음으로 달빛 별빛 모으신다 누구라 해탈한 듯 산속 절집 찾아오고 노스님 죽비 후려 새벽 군불 지피는데 선잠 깬 동자승 혼자 뒤척이며 찾는 엄마 제 십구 배, 생명의 샘물과 우..

시읽는기쁨 2013.06.07

벼슬을 저마다 하면 / 김창업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의원이 병 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 벼슬을 저마다 하면 / 김창업 한가한 일요일 오전, 집에서 빈둥거리며 TV를 보는데 'TV 쇼 진풍명품'에서 마침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 - 1721))의 영정이 나왔다. 11대 후손이 갖고 나온 그 영정값이 무려 2억 원이 넘었다. 노가재는 숙종 때의 문인으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학문이 깊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글과 그림에 능했는데 이 영정은 본인이 스스로 그린 자화상으로 전해지는 그림이었다. 노가재의 그런 삶이 이 시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벼슬이나 명예, 또는 건강을 바라는 것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

시읽는기쁨 2010.05.09

일신이 사쟈 한이 / 작자 미상

一身이 사쟈 한이 물것 계워 못 견딀쐬. 皮ㅅ겨 가튼 갈랑니 보리알 가튼 슈통니 줄인니 갓 깐니 잔 벼록 굴근 벼록 강벼록 倭벼록 긔는 놈 뛰는 놈에 琵琶 가튼 빈대 삭기 使令 가튼 등에 아비 갌다귀 샴의약이 셴 박희 눌은 박희 바금이 거절이 불이 뾰죡한 목의 달리 기다한 목의 야왼 목의 살진 목의 글임애 뾰록이 晝夜로 뷘 때 업시 물건이 쏘건이 빨건이 뜻건이 甚한 唐빌리예셔 얼여왜라. 그 中에 참아 못 견딜손 六月 伏더위예 쉬파린가 하노라. - 일신이 사쟈 한이 / 작자 미상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인데, 요사이 말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 내 한 몸 살아가자 하니 물것이 많아 못 견디겠네. 피의 껍질 같은 작은 이, 보리알같이 크고 살찐 이, 굶주린 이, 막 알에서 깨어난 이, 작은 벼룩, 굵은 벼..

시읽는기쁨 2008.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