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18

여름 하늘

염제(炎帝)의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다. 한낮 땡볕 가운데를 걸어도 긴 시간이 아니라면 즐길 만하다. 집 에어컨도 이제 한철 소명이 끝났다. 대신 선풍기 도움은 당분간 받아야겠지. 여름 하늘이 아름답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뭉게구름이 떠 간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하늘 풍경만 바라봐도 지리할 수가 없다. 길을 걸으면서 연신 하늘로 고개를 쳐든다. 그때마다 하늘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변화무쌍한 청(靑)과 백(白)의 그림판이다. 가을이면 운동회가 열렸다. 드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아이들은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고함치며 뛰놀았다. 청과 백으로 나눈 것이 하늘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지만 하늘은 누가 누굴 이기는 마당이 아니다. 청과 백이 어울리는 조화의 세계다. 지..

사진속일상 2023.08.18

하답 / 백석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아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 하답(夏畓) / 백석 옛 추억 속으로 젖어들게 하는 시다. 눈을 감으면 열 살 언저리 소년 시절의 나와 동무들이 보인다. 산으로 들판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여름의 주무대는 마을 앞 냇가였다. 멱감고, 헤엄치고, 다이빙하고, 물에서 나오면 모래사장에서 뒹굴었다. 땡볕에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가도 개의치 않았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기만 하면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동화 같은 시절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낙원에 다름 아니었다. 시에 나오는 광경은 우리 때보다 더 원초적이다. 아무리 그래도 개구..

시읽는기쁨 2023.08.16

손주와 여름휴가

방학을 맞은 손주와 전주에서 여름휴가를 함께 보냈다. 코로나 때문에 3년 만에 집 밖으로 벗어난 가족 휴가였다. 아직 조심스러워 사람으로 북적이는 데보다는 조용한 곳을 찾으려고 했다. 첫째 날은 전주로 내려가는 길에 춘장대해수욕장에 들렀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이 안 되서인지 넓은 해수욕장은 한산했다. 춘장대는 주차장이나 서비스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만 인지도에서 뒤처지는 것 같다. 반면에 인근에 있는 대천해수욕장은 머드축제로 인산인해라는 보도다. 처음에는 멈칫하다가 손주는 곧 물에 뛰어들었다. 썰물 때여서 바닷물은 자꾸 뒤로 물러났다. 둘째 날 오전에는 덕진공원으로 연꽃을 보러 갔다. 작년에는 공사 중이더니 호수 가운데의 연화정 건물을 비롯해 많은 부분이 변해 있었다. 연꽃도 만개중이었다. 오후에 손주..

사진속일상 2022.07.29

여름밤 / 김용화

견우직녀 만난다는 칠석날 밤 감나무 아래 모깃불 올리고 떠꺼머리 총각들 모여 앉아 말미 받아 돌아온 머슴살이 성배 형 연애담을 듣노라면 별자리 돌아 밤은 깊어 산골짝 옹달샘 마을 처녀들 목욕하며 쫑알대는 소리 꺼벙이 노총각을 앞세워 조심조심 오리걸음으로 다가갈 때 자발없는 어느 놈, 킬킬대 판을 깨면 앙칼진 처녀들 목청은 밤하늘로 날아가 별이 되어 반짝이고 - 여름밤 / 김용화 마당에 멍석을 펴고 온 식구가 저녁 밥상을 마주한다. 매캐하면서 구수하기도 한 모깃불 연기가 바람 따라 식구들을 순서대로 만나고 지나간다. 엄마는 큰 양푼이에 보리밥과 푸성귀를 섞은 비빔밥을 만든다. 상 가운데는 된장찌개가 뽀글뽀글 끓고 있다. 풀벌레들은 하루를 마감하는 노랫소리로 요란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남자들은 어디론가 흩..

시읽는기쁨 2022.07.03

보신탕 한 그릇

염제(炎帝)의 위력이 대단하다. 매일 에어컨 신세를 지는 게 어느덧 두 주째다. 무더위 속에서 무리할 일은 없지만 활동량이 적으니 몸의 기력이 떨어지는 게 확연하다. 에너지 보충을 위해 아내와 보신탕 집을 찾았다. 근년에는 보신탕 먹을 기회가 한 해에 한두 번밖에 안 된다. 전에 비해 확 줄었다. 대신 추어탕을 주로 한다. 그래도 한여름이 되면 가끔 보신탕에 구미가 당긴다. 아내가 뇌 수술을 받은 뒤에 조리를 하면서 보신탕을 참 많이 먹었다. 의사도 기력 회복과 상처가 빨리 아무는 데 도움이 된다고 권했다. 거의 한 달은 상식을 했을 것이다. 나는 퇴근하면서 보신탕을 사 가지고 가는 게 일과였다. 아내가 회복하는 데 보신탕의 도움이 컸다고 확신한다. 어느 신부님이 하는 말을 들었다. 오래전 신학교에 다닐..

사진속일상 2021.07.30

개똥지빠귀도 "덥다 더워"

여름 한낮, 나뭇가지에 개똥지빠귀 한 마리가 입을 벌린 채 힘겹게 앉아 있다. 가까이 다가가도 만사가 귀찮다는 듯 거들떠보지 않는다. 보통 때 같으면 작은 인기척에도 훌쩍 도망갔을 테다. 개똥지빠귀가 내쉬는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름 더위가 힘든 것은 새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너무 집안에만 있는 것 같아 일부러 한낮을 골라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탈까 했지만 좀 힘겹더라도 걷는 쪽을 택했다. 돌아와 샤워를 하니 개운하고 좋다. 덥다고 불평하지만 이것이 여름다운 날씨가 아닌가. 미세먼지 없이 맑은 데다 하늘은 본래 색깔대로 파랗다. 거기에 흰 구름의 장난질 치는 모습이 볼 만하다. 이 또한 멋진 계절이 아닌가!

사진속일상 2021.07.27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나는 학교에서 나온다 재빨리 그리고 정원들을 지나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동안 배운 걸 잊는 데 여름을 다 보낸다 2 곱하기 2, 근면 등등, 겸손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법, 성공하는 법 등등, 기계와 기름과 플라스틱과 돈 등등. 가을쯤 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다시 불려간다 분필 가루 날리는 교실과 책상으로, 거기 앉아서 추억한다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을,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 메리 올리버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 1935~2019)가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듣는다. 메리 올리버는 자연의 경이와 그 속에서 소박한 삶을 사는 기쁨을 노래한..

시읽는기쁨 2021.07.24

동네 여름꽃

오후에 동네를 산책하다가 갑자가 쏟아지는 소나기를 두 차례 만났다. 우산을 써도 잠깐 동안에 온 몸이 다 젖었다. 그렇더라도 여름 소나기는 반갑다. 후덥지근한 대기가 한순간에 청량한 기운으로 바뀐다. 따가운 여름 햇살에 목말랐던 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범부채 △ 나무수국 △ 원추리 △ 참나리 △ 털여뀌 △ 자귀나무 △ 능소화 △ 해바라기 △ 메꽃 △ 장미 △ 채송화

꽃들의향기 2021.07.20

불쑥 다가온 여름

어제는 31도, 오늘은 33도까지 낮 기온이 올라서 때 이른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올해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다. 난데없이 불쑥 덮친 여름이 앞으로 석 달간 이 땅을 불가마니를 만들 모양이다. 여름에는 더운 게 당연하지만 때가 때인지라 계절의 변화조차 심상치 않게 여겨진다. 봄의 코로나와 여름의 더위, 가을에는 또 뭐가 찾아올까. 인류는 앞으로 단단히 시달려야 할 것 같다. 그동안 지구에 대해 저지른 못된 행태에 대한 인과응보가 아닌가 싶다. 몸이 기온 변화에 쉬이 적응하지 못한다. 무겁고 무기력하다. 나이가 든 탓이리라. 이럴 때는 열심히 움직여야 할까, 가만히 쉬어야 할까. 어느 쪽이든 지나치면 안 하니만 못 할 것이다. 적절한 균형점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양생(養生)의 기본이리라. 목현천을 한 시간..

사진속일상 2020.06.09

2018년 여름

아침 기온이 20도 아래로 떨어졌다. 한낮 햇볕이 뜨거워도 30도에 미치지 못하니 여름의 기세가 푹 꺾였다. 2018년 올여름의 더위는 대단했다. 기상 관측 이래 제일 더웠다는 1994년의 기록을 대부분 갈아치웠다. 하루 최고 기온이 33도 이상이 된 날인 폭염 일수는 올해가 31.2일로 1994년의 31.1일을 넘어섰다. 40도를 넘어선 경우도 여섯 차례나 발생했다. 특히 8월 1일 기록한 홍천의 41.0도는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그날 서울도 39.6도를 찍었다. 그전까지는 낮 최고 기록이 1942년에 대구 40도가 유일했다. 전국 기상 관측소의 64%에서 역대 최고 기온이 올해 작성됐다. 이만하면 가공할 더위를 올여름에 경험한 셈이다. 거의 한 달 반 동안 외출은 엄두도 못 내고 집에서 에어컨과 함..

길위의단상 2018.09.01

손주와 속초 피서

손주를 모시고(?) 2박3일 속초에 피서를 다녀왔다. 아내와 사위 없이, 딸 둘에 손주 둘과 함께였다. 나는 오로지 기사로 필요했다. 둘째가 운전을 시작했으니 이런 여행은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다. 한반도가 펄펄 끓고 있다. 앞으로 더위라는 말이 나오면 기억에서 끄집어내야 될 2018년이다. 마침 우리가 간 때에 속초와 강릉 지방에는 200mm의 폭우가 쏟아졌다. 덕분에 낮 기온도 20도 중반대로 떨어졌다. 피서를 제대로 한 셈이다. 첫날 저녁에는 봉포 해변으로 바다 구경을 나갔다. 구름이 잔뜩 몰려왔다. 밀려오는 파도를 피하며 아이들은 즐거워했다. 둘째 날, 오전에는 세찬 비가 퍼부었다. 비가 잦아든 오후가 되어서야 아이들은 워터피아로 놀러갔다. 숙소는 한화 리조트였다. 마침 뽀로로 방이 배정되어 아이들..

사진속일상 2018.08.08

여름은 싫어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낮 기온이 35도를 넘어서고, 밤에는 열대야 때문에 잠을 설친다. 도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시멘트 열기로 더 고생이 심하다. 다행히 이곳은 서울보다 3~4도가 낮다. 낮에는 에어컨을 틀지만, 밤이 되면 창문을 닫아야 한다. 그래도 덥고 짜증 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여름은 싫다. 내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는 몸이 여름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부터 과민성대장증상으로 고생했다. 지금도 배와 냉기는 상극이다. 배에 찬 기운이 닿으면 바로 속이 싸늘해지면서 설사가 난다. 그래서 에어컨 바람을 싫어한다. 여름 차 안에서는 배에다 방석을 대고 있어야 한다. 어떨 때는 선풍기 바람에도 신호가 온다. 여름이라도 시원한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팥빙수를 좋아하지만 항상 ..

길위의단상 2017.08.08

손주와 여름 휴가

손주 따라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나는 기사 역할을 맡았다. 장마의 막바지여서 여행 내내 햇빛을 보지 못했다. 가끔 소나기가 지나갔다. 부여 롯데리조트에서 2박을 했다. 부여 롯데리조트는 조형미가 아름다운 건물이다. 전통과 현대미의 조화에 신경을 쓴 것 같다. 현재를 살지만 우리도 과거의 씨줄과 얽히며 삶의 무늬를 그린다. 어떤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발목을 잡는 과거의 사연이 있다. 놀러 온 사람이 있고, 그걸 시중 드는 사람이 있다. 부모를 잘 만나 땀 흘리지 않고 호의호식 하는 사람이 있고, 평생 근면하게 노동을 해도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옆을 지나가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손주에게 부여를 설명하자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은 오직 물놀이가 좋은 나이다. 가족이 아..

사진속일상 2017.07.25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옛날 여름 저녁 풍경이 담박하게 펼쳐진다. 평안도 토속어가 감칠 맛 나는 백석 시다. 이때 도시라면 창문 닫아걸고 에어컨을 켤 것이다. 어찌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당 멍석자리에 누워 모깃불 연기 맡으며 하늘의 별을 쳐다보던 그때가 아련하다. 할머니의 부채 바람이 낯을 간지렸고. 어른들의 알 듯 모를 듯한 세상..

시읽는기쁨 2016.07.18

남한산성 여름꽃

답답한 마음을 달래는 데는 걷기와 함께 꽃사진 찍기도 도움이 된다. 파인더로 꽃에 집중하다 보면 세상의 시름을 다 잊는다. 그런 목적으로 남한산성을 찾았다. 매크로 렌즈를 만져보기도 오랜만이었다. 무엇에 그리 바빴는지 모르겠다. 쥐손이풀 참나리 파리풀 짚신나물 땅비싸리 수크렁 달맞이꽃 양지꽃 갈퀴나물 박주가리 누리장나무꽃 개망초 기린초 돌콩 금계국 큰제비고깔 등골나물 으아리 뱀무 강아지풀 무릇

꽃들의향기 2015.08.11

가장 길었던 장마

어제로 장마가 끝났다. 6월 17일에 시작해서 8월 4일에 종료되었으니 49일 동안 이어졌다. 기상 관측을 한 이래 가장 길었던 장마였다. 종전 기록은 1974년과 1980년의 45일간이었다. 장마전선이 주로 중북부에 머물러서 실제 장마를 겪은 건 중부 지방이었다. 남부는 장맛비보다 폭염에 시달렸다. 기상청 자료를 찾아보니 서울은 7월 중에 비가 오지 않은 날이 닷새밖에 안 되는데, 부산은 반대로 비가 온 날이 엿새였다. 반쪽장마라는 말 그대로였다. 좁은 땅인데 전연 다른 여름을 경험한 것이다. 긴 장마였지만 비 피해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7월 한 달간 서울의 강수량이 703mm였다. 대체로 고루 분산되어 내렸다. 생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에게 장마는 여름의 휴식기다. 매..

길위의단상 2013.08.05

여름의 한가운데

어제는 서울 기온이 35.4 도에 달하며 4 년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하루 종일 에어컨 생각이 간절했다. 밤에는 올림픽 개막식을 보느라고 그나마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밤새 식구들마다 하나씩 선풍기를 옆에 끼고 자야 했다. 게절은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덥다고 집에만 있는 것보다는 땀을 흘리더라도 밖에 나가는 것이 낫다. 오늘은 가까이 있는 뒷산에 올랐다. 여름의 뭉게구름이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산길 산책로에 '달마사'라는 절이 있다. 아담하면서 항상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인상이 좋은 절이다. 오늘은 절 입구에 목사님의 법문이 있을 것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미 날짜가 지났지만 무척 기분이 좋았다. 생각이나 신념 차이로 인해온갖 다툼이 생기는 현실에서 자신과 다른 신앙을 이해하려는..

사진속일상 2008.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