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9

비 가는 소리 / 유안진

비 가는 소리에 잠 깼다 온 줄도 몰랐는데 썰물 소리처럼 다가오다 멀어지는 불협화의 음정(音程) 밤비에도 못다 씻긴 희뿌연 어둠으로, 아쉬움과 섭섭함이 뒤축 끌며 따라가는 소리, 괜히 뒤돌아보는 실루엣, 수묵으로 번지는 뒷모습의 가고 있는 밤비 소리, 이 밤이 새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모양이다 가는 소리 들리니 왔던 게 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 사랑도 기회도 오는 줄은 몰랐다가 갈 때 겨우 알아차리는 어느새 가는 소리가 더 듣긴다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 시절도 밤비도 사람도.... 죄다 - 비 가는 소리 / 유안진 비 '오는' 소리만 알았지, '가는' 소리를 의식하지는 못했다. 오는 게 있으면, 응당 가는 것도 따른다. 삼라만상의 변화가 그러하다. 누구나 이 세상에 던져지듯 왔다가 불현듯 사라져 간다..

시읽는기쁨 2019.02.16

걱정 마, 안 죽는다 / 유안진

겁먹은 선생님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이 엄마에게 고했다 글쎄 예가 동전을 삼켰대요 얼마짜리를요? 엄마는 태연하게 물었다 친구의 100원짜리를 빼앗아 놀다가, 뺏긴 친구가 뺐으려 하자, 입에 넣고 삼켜 버렸대요 엄마, 나 죽어, 하며 아이는 울어댔지만, 엄마는 더 태연했다 남의 돈 수천씩 먹고도 안 죽는 사람 많더라 설마, 그깟 것 먹고 죽을까잉, 걱정 마 기가 막힌 선생님은 돌아갔고, 아이는 그래도 걱정되어 기도했다 하느님, 앞으로는 절대로 남의 돈 안 먹을 테니 살려주세요 다다음날 아침, 앉은 변기에서 똑 소리가 들려 돌아다보니, 대변에 하얀 동전이 섞여 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엉덩이를 깐 채로 감사기도부터 했다 - 걱정 마, 안 죽는다 / 유안진 이 엄마는 계모인가, 라고 물을 만하다. 아이를 키..

시읽는기쁨 2018.11.05

연인의 자격 / 유안진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홀씨 바람 타듯이 생활은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지붕마다 흥건한 가을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습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 줄 아는 사람 몇 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 잃는 것 얻는 것에 별 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 받지 못하는 시 한 편도 희고 붉은 피톨 섞인 눈물로 쓰인 줄을 아는 사람 커다란 것의 근원일수록 작다고 믿어 작은 것을 아끼는 사람 인생에 대한 모든 질문도 해답도 자기 자신에게 던져서 받아내는 사람 자유로워지려고 덜 가지려 애쓰는 ..

시읽는기쁨 2012.11.28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만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 배꼽에 손이 갈 때 / 유안진 지난봄 단임골에 갔을 때였다. 꽃순이와 나무꾼은 노래를 부르고는 꼭 “배꼽인사” 라고 말하면서 허리를 깊이 숙이고 인사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 인상적이었다. 두 손을 공손하게 배..

시읽는기쁨 2010.11.26

성병에 걸리다 / 유안진

하느님 저는 투명인간인가 봅니다 바로 앞 바로 옆에 있어도 없는 듯이 여깁니다 불쾌하고 기분 나빠 '있다'고 '나'라고 주장하다가 지쳐 그만 성병(聲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초기 그리스도교도처럼 순교(殉敎)를 영광과 환희로 맞았던 초기 기독교도처럼 명성을 영광과 환희로 맞이하고 싶은데 도저히 정복할 수 없어서 국교(國敎)로 삼아버린 로마제국처럼 제가 정복할 수 없는 명성(名聲)은 저의 종교가 되었나 봅니다 정복할 수도 정복될 수도 없는 성병에 걸려서 스스로를 얼마나 속이며 기만했으며 꿈과 성병을 구별하지 못했던가를 선망과 조롱으로 우습게 보았던 타인과 자신을 사람 본래로 보게 눈 열어주십시오 죽는 순간까지도 해방될 수 없다는 그 성병을 저만은 반드시 살아서 고쳐서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 성..

시읽는기쁨 2009.09.05

눈은 너무 작으니까 / 유안진

물고기의 눈에는 물이 안 보이고 새의 눈에는 공기가 안 보이고 용의 눈에는 돌이 안 보인다지 꽃이 피면 꽃나무는 안 보이고 열매가 열리면 가지는 안 보이고 아기를 안으면 엄마 아빠는 안 보이지 젊은 가장을 대신하여 독가스실로 들어가 준 막시밀리언 콜베 신부도 나치의 눈에는 유태인으로만 보였지 마음은 공기는 우주는 神은 안 보이니까 눈은 너무 작으니까 눈이라고 다 눈은 아니니까 - 눈은 너무 작으니까 / 유안진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보고 싶은 것을 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보는 것을 전부인 줄 착각한다. 물리적으로도 인간의 눈이 보는 것은 전자기 스펙트럼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얼마나 넓게 펼쳐져 있는지 우리는 잊고 산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믿는 것..

시읽는기쁨 2008.12.09

마음 / 유안진

그릇아 세상을 담아낼 만치 커질 수도 있고 자살밖에 도리없어 작을 수도 있는 마음아 눈꼴시어 못 보겠던 남의 인생도 내 것처럼 우는 이와 같이 울고 웃는 이와 같이 웃자 대문에 이마에 앞가슴에 '헌 나는 없어졌음' 이런 문패 하나 내걸고 싶어 빈 그릇처럼 나머지가 없는 찌꺼기도 없는 - 마음 / 유안진 마음은 요술쟁이다. 전 우주를 품을 만큼 넉넉해지기도 하고, 바늘 하나 꽂을 수 없을 만큼 옹졸해지기도 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이런 변덕을 겪는다. 점수(漸修) 뒤에 돈오(頓悟)는 과연 찾아오는 것일까?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과연 얼마 만큼의 영적인 진보를 할 수 있을까? 같은 돌부리에 반복해서 똑 같이 넘어지며 나는 늘 제자리 걸음만 하는 것 같다. 인생 학교에서 나는 우둔한 학생임을 고백하지..

시읽는기쁨 2005.01.10

용서받는 까닭 / 유안진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이 있고 들리지 않아도 소리내는 것이 있다 땅바닥을 기는 쇠비름나물 매미를 꿈꾸는 땅 속 굼벵이 작은 웅뎅이도 우주로 알고 사는 물벼룩 장구벌레 소금쟁이 같은 그것들이 떠받치는 이 지구 이 세상을 하늘은 오늘도 용서하신다 사람 아닌 그들이 살고 있어서 - 용서받는 까닭 / 유안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인간이 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진 인간족 말고 이 말에 동의할 생물은 없을 것 같다. 땅도 하늘도 침묵하고 있지만 가만히 눈 감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잘 살아 보자는 명분 아래 환경을 파괴하고 다른 생명을 멸종시키며 그러고도 당당하게 큰 소리만 치고 있다. 스스로의 묘혈을 파면서도 그걸 지혜로 착각하고 있다. 천성산의 도룡뇽이..

시읽는기쁨 2004.08.24

유안진의 詩 두 편

슬퍼지는 날에는 어른들아 어른들아 아이로 돌아가자 별똥 떨어져 그리운 그곳으로 가자 간밤에 떨어진 별똥 주우러 가자 사랑도 욕스러워 외로운 날에는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물어보자 개울가의 미나리아재비 물봉숭아 여린 꽃이 산기슭의 패랭이 엉겅퀴 산난초가 어째서 별똥 떨어진 그 자리에만 피는가를 어른들아 어리석은 어른들아 사는 일이 참말로 엄청 힘들거든 작고도 단순하게 경영할 줄도 알아야지 작아서 아이같은 고향 마을로 가서 밤마다 떨어지는 별똥이나 생각다가 엄마 누나 무릎 베고 멍석자리 잠이 들면 수모도 치욕도 패배도 좌절도 횃불꼬리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 찬란한 별똥별이 되어주지 않을꺼나 문득 너무 오래 사람이었구나 아장걸음 걸어오는 새벽 봄비에 미리..

시읽는기쁨 2003.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