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6

작은 것을 위하여 / 이기철

굴뚝새들은 조그맣게 산다 강아지풀 속이나 탱자나무 숲 속에 살면서도 그들은 즐겁고 물여뀌 잎새 위에서도 그들은 깃을 묻고 잠들 줄 안다 작은 빗방울 일부러 피하지 않고 숯더미 같은 것도 부리로 쪼으며 발톱으로 어루만진다 인가에서 울려오는 차임벨 소리에 놀란 눈을 뜨고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가슴은 떨리지만 밤과 느릅나무 잎새와 어둠 속의 별빛을 바라보며 그들은 조용한 화해와 순응의 하룻밤을 새우고 짧은 꿈속에 저들의 생애의 몇 토막 이야기를 묻는다 아카시아꽃을 떨어뜨리고 불어온 바람이 깃털 속에 박히고 박하꽃 피운 바람이 부리 끝에 와 머무는 밤에도 그들의 하루는 어둠 속에서 깨어나 또 다른 날빛을 맞으며 가을로 간다 여름이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들녘 끝에 개비름꽃 한 점 피웠다 지우듯이 가을은 아무도..

시읽는기쁨 2021.06.11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 이기철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그러면 풀들의 숨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발이 간지러운 풀들이 반짝반짝 발바닥 들어올리는 소리도 들릴 거예요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아픔처럼 꽃나무들 봉지 튀우는 소리 들릴 것입니다 햇살이 금가루로 쏟아질 때 열 마지기 논들에 흙이 물 빠는 소리도 들릴 거예요 어디선가 또옥똑 물방울 듣는 소리 새들이 언 부리 나뭇가지에 비비는 소리도 들릴 것입니다 사는 게 무어냐고 묻는 사람 있거든 슬픔과 기쁨으로 하루를 짜는 일이라고 그러나 오지 않는 내일을 위해 지레 슬퍼하지 말라고 산들이 저고리 동정 같은 꽃문 열 듯 동그란 웃음 하늘에 띄우며 봄 아침엔 화알짝 창문을 여세요 - 봄 아침엔 창문을 여세요 / 이기철 잔인하고 우울한 계절이 계속되고 있다. 온 나라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어둡..

시읽는기쁨 2014.05.10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 이기철

나팔꽃 새 움이 모자처럼 볼록하게 흙을 들어 올리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질까 두렵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와 새끼 새의 입에 넣어주는 걸 보면 나는 세상이 너무 따뜻해질까 두렵다 몸에 난 상처가 아물면 나는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저 추운 가지에 매달려 겨울 넘긴 까치집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이 도시의 남쪽으로 강물이 흐르고 강둑엔 벼룩나물 새 잎이 돋고 동쪽엔 살구꽃이 피고 서쪽엔 초등학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북쪽엔 공장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할까 두렵다 서문시장 화재에 아직 덜 타고 남은 포목을 안고 나오는 상인의 급한 얼굴을 보면 찔레꽃 같이 얼굴 하얀 이학년이 가방을 메고 교문을 들어가는 걸 보면 눈 오는 날 공원의 벤치에 석상..

시읽는기쁨 2011.03.11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시읽는기쁨 2006.06.15

길의 노래 / 이기철

내 마지막으로 들 집이 비옷나무 우거진 기슭이 아니면 또 어디겠는가 연지새 짝지어 하늘 날다가 깃털 하나 떨어뜨린 곳 어욱새 속새 덮인 흙산 아니고 또 어디겠는가 마음은 늘 욕심 많은 몸을 꾸짖어도 몸은 제 길들여온 욕심 한 가닥도 놓지 않고 붙든다 도시 사람들 두릅나무 베어내고 그곳에 채색된 丹靑 올려서 다람쥐 들쥐들 제 짧은 잠, 추운 꿈 꿀 穴居마저 줄어든다 먼 곳으로 갈수록 햇빛도 더 멀리 따라와 내 여린 어깨를 토닥이는 걸 보면 내 어제 분필과 칠판 앞에서만 열렬했던 말들이 가시 되어 일어선다 산골 처녀야, 눈 시린 十字繡 그만두고 여치 메뚜기 날개 접은 들판 콩밭 누렁잎 보아라 길 끝에 무지가 차라리 편안인 산들이 누워 있고 산 끝에 예지도 거추장스러운 피라미들에게 맡겨버린 물이 마음 풀고 흐..

시읽는기쁨 2006.05.24

마흔 살의 동화 / 이기철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부는 바람 따라 길 떠나겠네 가다가 찔레꽃 향기라도 스며오면 들판이든지 진흙 땅이든지 그 자리에 서까래 없는 띠집을 짓겠네 거기에서 어쩌다 아지랑이 같은 여자 만나면 그 여자와 푸성귀 같은 사랑 나누겠네 푸성귀 같은 사랑 익어서 보름이고 한 달이고 같이 잠들면 나는 햇볕 아래 풀씨 같은 아이 하나 얻겠네 먹고 사는 일 걱정되지 않으면 나는 내 가진 부질없는 이름, 부질없는 조바심 흔들리는 의자, 아파트 문과 복도마다 사용되는 다섯 개의 열쇠를 버리겠네 발은 수채물에 담겨도 머리는 하늘을 향해 노래하겠네 슬픔이며 외로움이며를 말하지 않는 놀 아래 울음 남기고 죽은 노루는 아름답네 숫노루 만나면 등성이서라도 새끼 배고 젖은 아랫도리 말리지 않고도 푸른 잎 속에 스스로 뼈를..

시읽는기쁨 2006.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