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7

건들건들 / 이재무

꽃한테 농이나 걸며 살면 어떤가 움켜쥔 것 놓아야 새것 잡을 수 있지 빈손이라야 건들건들 놀 수 있지 암팡지고 꾀바르게 사느라 웃음 배웅한 뒤 그늘 깊어진 얼굴들아, 경전 따위 율법 따위 침이나 뱉어주고 가볍고 시원하게 간들간들 근들근들 영혼 곳간에 쟁인 시간의 낱알 한 톨 두 톨 빼먹으며 살면 어떤가 해종일 가지나 희롱하는 바람같이 - 건들건들 / 이재무 CBS 라디오에서 아나운서의 낭랑한 목소리로 소개받은 시다. "아, 그래!" 하며 잔잔한 물결로 가슴에 스며들었다. 세상살이 뭐 별것 있는가. 견주고, 탐내고, 다 헛된 짓거리가 아닌가. 하지만 누습에 절어 알면서도 어리석은 길에서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이번 주의 화두는 시의 제목인 '건들건들'로 삼기로 한다. 꽃한테 농이나 걸며, 가지나 희롱하는 바..

시읽는기쁨 2020.10.24

팽나무가 쓰러지셨다 / 이재무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哭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케키 장수가 다녀갔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들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 - 팽나무가 쓰러지셨다 / 이재무 장마가 시작된 어제였다. 수원 영통의 500년 느티나무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불과 한 달 전에 이 나무를 찾아갔었다. 우람하고 멋진 모습에 반했는데 무슨 변고..

시읽는기쁨 2018.06.27

내 일상의 종교 / 이재무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 내 일상의 종교 / 이재무 걸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종교 의식에 빠졌을 때와..

시읽는기쁨 2017.04.24

무서운 나이 / 이재무

천둥 번개가 무서웠던 시절이 있다 큰 죄 짓지 않고도 장마철에는 내 몸에 번개 꽂혀 올까봐 쇠붙이란 쇠붙이 멀찌감치 감추고 몸 웅크려 떨던 시절이 있었다 철이 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된 나는 천둥 번개가 무섭지 않다 큰 죄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쇠붙이 노상 몸에 달고 다녀도 그까짓 것 이제 두렵지 않다 천둥 번개가 괜시리 두려웠던 행복한 시절이 내게 있었다 - 무서운 나이 / 이재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천둥 번개에 놀란 아이들이 마리아의 방으로 뛰어들어오자 마리아는 'My Favorite Things'를 불러주며 안심시켜준다. 아이들과의 서먹한 관계가 이 일을 계기로 친밀하게 변한다. 천둥 번개를 무서워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재미있었던 장면이었다. 나이..

시읽는기쁨 2014.12.20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재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닷물에 텃밭 떠난 배추 같은 생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얻어 타고 먼 바다 휭, 하니 돌다 왔으면,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를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 좋겠다, 마량에 가면 / 이..

시읽는기쁨 2010.09.09

삼류들 / 이재무

삼류는 자신이 삼류인 줄 모른다 삼류는 간택해준 일류에게, 그것을 영예로 알고 기꺼이 자발적 헌신과 복종을 실천한다 내용 없는 완장 차고 설치는 삼류는 알고 보면 지독하게 열등의식을 앓아온 자이다 삼류가 가방끈에 끝없이 유난 떨며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일류가 몸에 대해 던지는 칭찬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우쭐대는 삼류 삼류는 모임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류와 어울려 사진을 박고 일류와 더불어 밥을 먹고 일류와 섞여 농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일류가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삼류 자신이 소모품인 줄도 모르고 까닭 없이 자만에 빠지는 불쌍한 삼류 사교의 지진아 아 그러나, 껍질 없는 알맹이가 없듯 위대하게 천박한 삼류 없이 어찌 일류의 광휘가 있으랴 노래를..

시읽는기쁨 2009.10.06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맨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그래, 모든 게 저 못된 것들 때문이야. 배낭 둘러매고 이 산 저 산 헤매이게 하는 것이며, 몇 잔 술에 취해 집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게 되는 것이며, 기어이 눈물을 보이게 하는 철없는 짓이며, 모든 게 저 못된 것들 탓이야. 그러나 이 환장할 봄날에 잠시 문제아가 되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봄의 유혹에 모른 척 빠져보는 것도 ..

시읽는기쁨 2009.05.06